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속활자 (문단 편집) == 유럽 == 한국에서는 흔히 유럽 쪽 금속활자의 첫 개발자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로 알려져 있으며, 구텐베르크의 발명과 고려의 금속활자를 비교하는 식의 교양 수준의 상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려-조선의 금속활자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1대 1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의 글씨를 종이에 찍어주는[* 그래서 Printing '''Press'''다. 활자판에 잉크를 바르고 인쇄기에 종이를 넣고 레버를 돌려 활자를 종이에 눌러주고 그대로 당기기만 하면 글씨가 찍혀 나오는 물건으로 기존 활자의 문제점인 필사 보다 별로 뛰어나지 못한 생산성 문제를 싸그리 해결해 버린 물건이다.]'''인쇄기와 인쇄술의 발명가'''이다. 구텐베르크가 자신의 인쇄기에 사용할 금속활자 규격도 같이 만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쇄기를 사용하기 위해 금속활자를 같이 고안한 것으로 금속활자는 인쇄기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 사학계는 구텐베르크를 인쇄기의 발명가라고 하지 금속활자의 발명가라고 부르지 않으며,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에 대해선 관심도 별로 가지지 않는다. 금속활자는 대량 인쇄의 한 도구일 뿐이다. 기존 인쇄술에서 재료를 금속으로 바꾼 거에 지나지 않아 생산성의 혁신이 없었던 고려의 금속활자와 달리,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기존의 활자 단독 사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간편한 인쇄를 가능하게 하였다. '''1분'''에 2~10장 인쇄가 가능했다. 활자 자체도 쿠텐베르크의 금속 세공업 경험 덕분에 주조 수준에서 매우 진보한 것이었고, 인쇄용 서체와 끈적하고 퍽퍽한 인쇄용 잉크도 따로 개발한 등, 여러모로 구텐베르크 이전의 활자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후에 유발된 사회, 문화적 변화 측면으로 비교해 봐도, 고려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동등한 비교의 여지가 없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대해 설명하는 책 중 많은 것이 종교개혁과 연관을 시키는 바람에 종교개혁 덕분에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퍼졌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정 반대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1450년으로부터 67년이 지난 1517년에야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이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사용하는 인쇄소는 온 유럽에 240개나 세워져 있었으며, 그 동안 인쇄소에서는 2000만 권에 달하는 서책을 생산하였으며, 이것은 이전까지 인류가 생산한 책의 총량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책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경제적인 목판 인쇄가 이전부터 쓰였으며, 명청 시대 및 일본 에도 시대에는 상업적 민간 인쇄는 대부분 목판 인쇄에 의존했다. 조선에서도 민간만이 아니라 국가 주도의 서적 인쇄에서도 대량 생산에는 그냥 목판을 계속 사용했다. 그 유명한 [[동의보감]]조차 대량으로 발부하는데에 목판이 사용되었지 금속활자는 딱히 사용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