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속활자 (문단 편집) === 구하기 어려운 재료 === 원래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납]]으로 주조했는데, 납은 물러서 오래 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조선)|세종]] 때부터 활자의 재료가 [[구리(원소)|구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구리는 [[한반도]]에서는 [[중국]], [[일본]]과 달리 생산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명나라]]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15세기경에는 명과 일본에서 구리를 어려움 없이 대량으로 수입하여 이용할 수 있었다. [[위키백과]]의 '조선의 활자' 항목에 따르면, 세종 때 하루에 주조하는 활자 수는 약 3,500자로, '''구텐베르크가 주조한 활자수의 약 10배에 달했다고''' 한다. 하루에 3,500자를 주조한 활자는 갑인자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정조때까지 주조되었을 정도로 조선의 표준 서체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6세기부터 명이 주변 민족으로부터 갖은 침략을 당하고, 조선에서도 왜구가 극성을 부려 대일 외교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조선에서 구리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침략에 대한 조선의 보복을 염려한 청과 일본의 불안감 때문에 구리가 조선 전기만큼 충분히 수입되지 못했다. 강철이 대량생산되기 전에는 대포는 화약의 폭발반동을 받아낼수 있게 탄성이 좋은 구리합금인 청동으로 만들었다. [[상평통보]] 등 화폐 주조에 사용할 구리도 부족하다는 원성에 사찰의 구리 범종까지 징발해 녹여서 화폐로 만들던 시절이라 활자를 구리로 만들 여유는 전혀 없었다. 구리 가격이 비싸다 보니 저렴한 목판인쇄가 성행했다. 흔히 고서를 분류할 때 경판본(京板本), 완판본(完板本) 등으로 구분하는데, 경판본은 한양에서, 완판본은 완산, 즉 전주에서 목판본으로 인쇄되었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안성과 대구에서도 목판인쇄가 성행하였다. 금속활자는 만들어진 해의 60갑자를 쓰지만 목판본은 주로 만들어진 지방이나 책 이름을 붙인다. 금속활자의 경우 중앙관청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중앙에서 만들어진 서적은 각 도로 전해져 목판을 새겨 다시 보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책 수요가 늘어나 훈련도감에서 책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나 활자가 부족해 훈련도감자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이전에 있던 활자들을 섞어야 할 정도로 물자가 부족했다. 그 덕에 훈련도감에서 제작된 책에는 각종 활자들이 뒤섞여 있다. 물론 활자를 만들고 책을 찍어내는 것은 사병의 몫이었다. 훈련도감자 제작 원인이 잉여가 되어버린 병사들을 어떻게 써먹을까 하다 나온 것이다. 그만큼 활자 제작과 인쇄에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증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