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속활자 (문단 편집) === 기술적 한계 ===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는 기술적으로 미흡하여 생산성이 목판 인쇄에 비해서도 심하게 낮았다. 금속활자가 최초로 발명된 13세기까지는 활자끼리 맞물리게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미흡했기 때문에 밀랍으로 두 활자를 붙여서 찍어내는 불완전한 방식을 채택했으므로 한번에 통째로 찍어내는데 무리가 많았다. 금속 주조 능력의 부족으로 글자의 모양이 바르지 못하고 획의 굵기가 불안정했으며, 인쇄 중에 흔들림이 많아서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많은 양을 찍지 못하고 중간중간마다 밀랍을 부어서 재조립해야했다. '''이때까지도 금속활자 한 판 가지고 하루에 찍어낼 수 있는 양은 하루에 열장도 채 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시대 직전까지 비슷한 방식이 유지되었으며, 민간이 아닌 국가 주도의 개발 덕분에 금속 주조 능력 자체는 발전하여 활자의 맞물림이 비교적 발전되었으나 여전히 하루에 20장 인쇄 정도가 한계였다. 세종 시대에 갑인자가 개발되어서 활자를 조립식으로 바꾸고, 활자의 틈새를 대나무로 메꾸는 등 더 발전했음에도 하루에 40장 정도가 한계였다. 이것은 조판 과정을 제외한 인쇄 속도를 말하는 것이라서, 한자의 복잡성과는 무관하다. 조선 시대에 활자의 내구성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것은 다름 아닌 인쇄 방법의 문제였는데, 활자 위에 먹물을 바른 다음 종이를 그 위에 덮고 문지르는, 말하자면 탁본과 비슷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손으로 하다보니 종이가 흔들리거나 문지르는 강도가 잘못되거나 먹의 농도가 잘못되면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졌다. 실제 인쇄본 유물을 보면 그렇게 망친 페이지가 여럿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