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속활자 (문단 편집) == 기타 == *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공식 인정을 받자 가장 반발하던 게 중국이었다. 최대의 떡밥은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이라는 부분이다.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39년 이전에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활자본이나 유물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다. [[2010년]] 고려시대 활자라는 '[[증도가자]]'가 공개됐으나 위조 논란이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존에 있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판본 중 하나가 금속활자본으로 밝혀 졌기에 [[증도가자]]에 대한 논란도 다시금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 2015년 11월 30일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개성 만월대 발굴 조사에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655408|고려시대 금속활자를 발굴]]했다. 이 활자는 정확한 출토지와 발굴 경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활자 제작시기는 만월대가 소실된 1361년 이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비파괴 검사나 성분 분석 등을 거쳐 정확한 제작 연도가 확인되면 1377년 제작된 직지심체요절은 콩라인으로 밀려난다. *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직지심체요절]] 이전의 금속활자본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이는 단순한 중국 측의 일방적인 [[역사왜곡]] 시도는 아니고, 주류 학계에서도 중국이 [[한국]]보다 앞서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한 나라로 유력하게 추정하고 있기때문에, 꾸준히 제기되는 떡밥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유물들이 소실된 탓에 [[고려]]보다 더 빨리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증거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1103년 발행된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을 금속활자본으로 주장했으나 금속활자가 아니라 찰흙활자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1341∼1345년 사이에 인쇄된 어시책(御試策)이 금속활자본이라 주장했으나 일본 정가당(靜嘉堂) 문고에 소장된 어시책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1341년 편찬된 목판본으로 확인됐다. * 중국쪽의 최대 [[떡밥]]은 원(元)나라의 왕정(王禎)이 1298년에 발간한 목판본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에 있는 '근세에 주석으로 활자가 기록되었다'라는 기록으로 이를 남송(南宋) 시기의 금속활자에 관한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근세가 정말 남송을 가리키는지도 불분명하고 실제 유물과 원판이 확인된 적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에선 자기들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고 교과서로 배운다. 대체로 1154년부터 지폐 인쇄에 사용됐다는 동활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 어린이 드라마 [[점프(EBS)|점프]]에선 금속활자를 다루고 금속활자를 지키는 에피소드가 있다. * [[유튜브]]에 [[역사학자]] [[임용한]]이 동료 학자들(노혜경, 김인호)과 함께 [[고려시대]] 금속활자와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및 [[인쇄술]]에 대해 비교 설명한 영상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들어가 보길. [[https://youtu.be/aAgcGIvo1nE|직지와 인쇄술(1)]] [[https://youtu.be/1fhyW98SH5g|직지와 인쇄술(2)]] * 2020년 4월 21일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제758-2호)이 그전까지의 해석인 목판본 인쇄가 아닌 금속활자본 인쇄임이 밝혀졌다.''' 직지보다 무려 138년이 앞선 셈이다. 소장자 원진스님은 이 책이 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신을 갖고 박상국 교수에게 재감정을 요청했고, 박상국 교수는 이에 비판적 검토를 실시했다. 그런데 금속활자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글자 모습이 나왔고, 책에 등장하는 최이의 발문 중 ‘중조주자본(於是募工 重彫鑄字本)’ 구절을 한학자 이정섭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정섭 선생은 한치의 주저없이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주조한다’고 해석했다. 즉 90년간 잘못 번역한 셈이다.[[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3004800|#]] * 2021년 6월 2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인 인사동 79번지에서 '''15~16세기 조선 전기에 사용된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활자 1000여 점과 한글 활자 600여 점'''이 출토됐다.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출토품들 가운데 가장 시기가 늦은 유물이 [[1588년]]을 뜻하는 만력 무자년 간기가 새겨진 [[승자총통|소승자총통]]이어서 일러도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이 확실하다.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 유적을 발굴하던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연구원장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가까워 당시 전란을 맞으면서 유물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피난을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9&aid=0004816037|#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12489977|#2]] [[https://news.v.daum.net/v/20210629090606224|#3]] [[https://news.v.daum.net/v/20210629200559475|#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