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본위제도 (문단 편집) === 브레턴우즈 체제(1944~1971) === [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연표)] [[파일:87c-Bretton-Woods-World.jpg]]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미국은 전후 세계의 금융질서를 세우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거의 3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끝에 '''[[1944년]] [[7월 1일]]''', '''44개 동맹국'''과 이들의 식민지에서 온 730명의 대표단이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턴우즈'''(Bretton Woods)라는 스키 휴양지에 있는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 모였다.[* 왜 하필 브레턴우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나 하면, 당시 미국 내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했었고, 때문에 미국 대도시의 유명 호텔들이 비백인국가에서 오는 대표단에 거부감를 느껴 호텔 대여를 거부한 것이라고 한다.[[https://www.google.com/am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9/27/EWNPVQ6PUFB5LIQVJ2B5UTQRVM/%3foutputType=amp|#]]] [[소련]]을 포함한 전 세계 44개 국가와 정부를 비공식으로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모인 회의 석상에서 신통화제도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케인즈]]는 어느 국가의 통화도 아닌 국제 통화인 방코르(Bancor)를 도입할 것을 지지하였으나, 해리 덱스터 화이트[* 현대적 자유교역시장과 US달러를 기반으로 한 기축통화 시스템의 입안자이자 주요 설계자인 재무관료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경제기반을 지지하던 케인지언임과 동시에 소련에 호의를 표하며 소련 정보당국에 협조하던 스파이였는데 그가 신념적으로 소련의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했는지, 아니면 브레턴우즈 체제에 소련을 완전히 통합시킬 수 있다는 개인적 믿음으로 월권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선 미국 역사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의 가족들은 오늘날까지 화이트가 [[볼셰비키]] 추종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부 일본의 우익학자들과 [[넷우익]]은 화이트가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미일관계를 배후에서 사보타주하며 최종적으로 [[헐 노트]] 작성에 개입해 일본제국을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끌여들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는 패권국이 된 [[미국]]의 [[미국 달러|USD]]를 통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의 입장이 받아들여져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본위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을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BWS)'''라고 부르게 된다. 고전적 금본위제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각국의 [[중앙은행]]이 금 [[태환]]을 독자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만이 독점적으로 금 태환을 실시'''하는 것으로써, 타국 통화는 모두 [[미국 달러|USD]]와의 환전을 통해 간접적으로 금과 연결되었다. 세계 각국의 화폐가 (주기적으로 변경되는) 고정 환율로 달러와 고정되고, 달러는 35달러당 금 1온스로 교환할 수 있게 고정한 것이다. 이 제도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럽 각국이 미국의 물자를 금으로 구입하고 패전국들이 전쟁 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하면서, '''종전 당시 미국이 전 세계 금의 무려 70%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https://www.imf.org/external/np/exr/center/mm/eng/mm_dr_01.htm|링크]] 전후 서유럽 국가들은 재건을 위해 막대한 양의 돈을 찍어 유통시켜야 했는데, 자체적으로 금본위제도나 [[은본위제도]]를 실행할 만큼의 금은이 국고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신용화폐'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므로, 전시도 아닌 평상시에조차 금이나 은으로 태환이 안 되는 화폐가 신용을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당시 경제활동 인구, 특히 투자 / 고용을 주도할 장년층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전간기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직접 경험 / 목격한 세대였다. 지금(2010년대)이야 정부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하는 화폐를 의심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당시는 오히려 믿는 쪽이 이상했던 것이다. 전쟁 직후 이들이 발행한 지폐는 '''사실상 미국이 대리로 보증을 서준 셈'''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서유럽의 동맹국들을 쑥대밭으로 내버려두면 당시 떠오르는 강자였던 [[소련]]에 의해 전 유럽이 공산화될 위험이 있었고, 어느 국가의 통화도 아닌 방코르는 위험했기 때문에[* 무역 불균형 때문에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경쟁력 있는 나라가 끊임없이 무역 흑자를 내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나라는 끊임없는 무역적자 + 경제제재의 이중고를 겪다가 방코르를 포기하거나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위협. 고정환율제의 문제와 비슷한데 특히 현재 유로가 유럽 역내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비슷하다.] [[미국 달러]]를 [[기축 통화]]로 민 것이다. '''한편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단지 기축통화뿐만은 아니었다.''' 대표단은 화이트와 [[케인즈]]가 제시한 의제 검토에 착수했고 3주에 걸친 다자간 협상을 한 끝에 '''[[세계은행]](The World Bank)''', '''[[국제통화기금]](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부흥개발은행]](The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을 설립하기로 했다.[* 덤으로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이 체결되었고 이는 현재 1995년 발족한 [[세계무역기구]](WTO)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기구들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유럽]]을 회생시키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자유무역이 지배하는 세계경제체제의 근간을 마련했다. 동시에 이 회의 석상에서 미국 대표단은 막강한 미국의 해군력으로 전세계의 모든 해상무역로를 보호할 것이며, 동시에 세계적으로 가장 거대한 미국 시장을 외국에 개방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미국이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하고 모든 해상 무역을 철저히 보호하는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소비 시장인 미국에 대해 무제한의 접근 기회를 부여했고, 미국이 제시한 이 체제에 동참하는 국가들이 자국의 시장을 미국 상품에 개방하리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은 사실상 회의에 참석한 모든 나라의 경제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셈이었다. 즉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앞으로 세계경제는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자유무역체제로 굴러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 소련과 공산권은 결국 [[마셜플랜]]을 거부하고 [[코메콘]]이라는 독자적인 경제블록을 형성하면서, 미국 주도의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장질서 바깥에 놓이게 된다. 바로 [[냉전]]의 시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