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나라 (문단 편집) ==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 금나라는 [[세종(금)|세종]]부터 금 [[장종(금)|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 되는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이미 장종 때부터 쇠퇴는 드러난 상황. 사실 금 세종 때가 제대로 된 전성기였지만 화북 왕조인 데다 전성기가 워낙 짧았다.]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막 북송을 몰락시켜 한껏 기세를 타며 남하할때까지는 가히 적수가 없었으나, 금 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중국)|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나여 기세가 한풀 꺾이고 양국간의 고착 상태가 진행된 뒤부터는,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 등을 뜯어냈지만 결정적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이 없었다'''. 금은 분명히 그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 작전을 여러 차례 시도한 바가 있지만 다 물말아먹고 끝나버렸다. 한마디로 한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원[* 정확히는 최대로 잡아도 [[장강]] 이북이고, 사실상 [[회수]] 이북 지역만 차지했다.]을 차지할 역량까지는 가지고 있었을지언정 중국 전역을 완전히 다 차지할 역량까지는 없었던 것. 물론 금나라가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기회가 있었다. 바로 1129년 금나라의 정예군이 장강을 넘어와 당시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까지 함락시켰지만 임안이 함락되기 직전에 간발의 차이로 남송의 황제 [[고종(송)|고종]]이 단신으로 남중국해로 도망쳐서 송나라의 명줄을 완전히 끊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대신에 양쯔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 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남송)|유예]]를 황제로 옹립함으로 써 제나라를 남송 정벌의 전초기지를 삼는데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금나라의 이 계획마저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진회]]가 포로에서 탈출해 남송에 복귀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후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1131년에는 [[오린(북송)|오린]]과 오개 형제, 수군장수 강민 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에는 악비가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고 1134년이 되면 한세충이 다시 한번 금군을 대파하였다. 계속되는 패배로 실의에 빠진 [[태종(금)|금태종]]이 1135년에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금나라는 극심한 피해와 계속된 패전으로 인해 제정적으로 감당이 어려워지자 결국 1137년 괴뢰국이었던 제나라를 폐지했다.[* 제나라가 폐지된 뒤 유예는 촉왕(蜀王)으로 봉해졌다가 그 일가가 임황(臨潢)으로 옮겨진 뒤엔 조왕(曹王)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1146년 10월 18일 사망했다.] 1142년 [[진회]]의 협상으로 양국은 휴전하기로 합의를 봤고 이 때부터 금나라와 남송의 경계는 회수를 기점으로 서로 남북으로 나누어졌고 금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실제로 [[정강의 변]]으로 변경이 함락되고 송조가 강남으로 밀려났음에도 금나라는 곧바로 화북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금나라는 정강의 변 직후 [[장방창]]을 황제로 내세워 괴뢰국 [[초나라]]를 수립했고, 장방창이 남송으로 달아나자 다시 [[유예(남송)]]로 하여금 [[제나라]]를 세우게 하는 등 무려 10년간 연운 16주 이남 지역을 직할통치하지 않고 한족 괴뢰정권에 맡기는 쪽을 택했다. 결국 그 제나라마저 남송군에 털리는 신세가 되자 울며 겨자먹기로 제나라를 폐지하고 스스로도 힘에 부치는 것을 잘 아는 화북 전역의 직할 통치를 짊어진 쪽에 가까웠다.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남송의 경제력이 믿을 수도 없을 만큼 가공한 데 반하여,[* 이미 요나라 때부터 [[전연의 맹]]으로 인해 막대한 세폐를 갖다바치다시피 했고 금나라가 들어서자 강남 개발에 주력하여 '''더 많아졌다.''' 더군다나 남송 때는 금나라한테 화북 지역을 빼앗겨 영토도 인구도 줄었지만 그럼에도 남송은 나름 멀쩡했다. 특히 남송의 추정인구만 해도 무려 8천만에 달한다.]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주는 금나라의 경제력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결함 국가 수준'''이었다. 특히 금세종 이전까지 국가예산에 대한 회계도 없다시피 했으며 건국때부터 꾸준히 재정난에 시달렸다. [[공명첩|민간에게 납속을 받아 관직을 주는 상황]]이 금의 전성기었던 금 세종 대에도 나타났으니 그만큼 금의 재정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의 [[해릉양왕]]이 소위 [[채석기 전투|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려다가 모두 실패했으며]] 나중에는 송군이 아닌 반란군에게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에게 숙주(宿州)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해릉양왕의 뒤를 이은 [[세종(금)|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금나라 군대가 이를 수복시켜서 즉시 숙주를 되찾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금 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일시적인 기세를 이어가는 일이면 몰라도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금나라는 군사적인 우위에도 정작 경제를 남송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 터라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긴다. 심지어 남송에게 받은 세공조차 남송과의 무역으로 오히려 상당부분이 남송으로 다시 유출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 사신이 금에 왔을 때 금세종이 조공받는 나라의 체면에 걸맞지 않게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직접 고려 사신들의 사무역을 통제했을 정도였다.[* 조공을 바치러 올 때 사무역을 통해 재미를 보는 것은 조공국 입장에서의 일종의 권리 비슷한 것이며 상국은 이를 적당히 눈감아주면서 선심을 쓰는 것인데, 조공은 조공대로 바치라면서 사무역을 막아버리면 조공국 입장에서도 몹시 언짢아지며, 아랫사람에게 지나치게 쩨쩨하게 구는 높으신 분들마냥 위신도 안 서고 당연히 조공 바치는 나라의 상국 노릇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려는 금나라에 명목상으로만 칭신했을 뿐 실제로는 금을 제대로된 상국으로 모신다기보단 화친 국가 정도로 취급했으며, 금 또한 고려가 자신들을 제대로 섬기질 않고 명목상 칭신하는 것을 알지만 모른척하며 조공을 바치면서 적대적이지 않은 것만 확인하며 넘어가고 고려에 그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정작 금은 장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남송같은 부국(富國)을 무너뜨리려면 대등하거나 상회하는, 하다못해 상대의 80%라도 되는 생산력과 인구수를 보유해야하는데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큰 상황에서 남송에게 받는 세공/세폐 등을 국력 신장에 투자하기는 커녕 무역으로 다시 되돌려주는 꼴이었으니 금나라의 철기병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5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오히려 남송이 막강한 경제력과 압도적인 인구수로 금나라를 압박해서 화북 지방을 되찾는게 가능했을 수도 있다. 물론 역대 최강 유목 제국인 '''몽골 제국'''한테 금나라랑 같이 쓸려나갔지만...][* 어쨌든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통일 중화 제국의 황제들은 고구려, 신라 같은 한반도 왕국들을 멸망시키는게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다고 허장성세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온 국력을 쏟아부어도 오히려 실패하고 물러났으며 더 오래전인 한(漢)나라 시기에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얼마 못가 영향력을 상실했다. 당장 국력이 상승일로였던 시기의 금나라도 송나라의 10분의 1~20분의 1밖에 안되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오히려 송나라와의 전쟁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다. 인구 400만 남짓한 고려가 17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했을 정도다.] 금 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즉 상하관계의 급이 완화된 것이다.[* 공(貢)이라는 글자의 뜻이 짐작되다시피 조공을 바친다, 공녀를 바친다 할 때 그 공 자인 만큼 강한 수직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금나라는 그만큼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 만큼 절박했다.[* 경제적인 요건도 있지만, 그 밖에도 [[해릉양왕]]이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나, 거란족의 반란 등으로 금의 사정이 급했다.] 물론 남송도 북벌하여 금나라를 칠 만한 수준이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에게 격퇴되어 수비는 가능했다. 결국엔 금이나 남송이나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던 것이다.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었고,[*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여진족 인구는 600만인데, 한족이 (금나라 영토니 당연히 화북에만) 44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여진족 인구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적은 약 70만 정도일 가능성도 있다.[[http://cafe.naver.com/historygall/63518|#]]][* 그나마 금나라는 이 정도나마 여진족의 비율이 있었지 후대인 [[원나라]], [[청나라]]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이들은 화북뿐만 아니라 강남까지 중국 전체를 다 차지해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릉왕이 남송을 공격했을 때 거란인들과 [[해족]]을 징집하자 그들이 이에 반발하여 서북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해릉왕이 남송정벌을 위한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반란군이 아예 서북쪽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이후 금 세종에게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게다가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역대급 속도로 지배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여진족이 그야말로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러나 남송의 사신이 한탄할 정도로 화북의 한족들 역시 여진족의 의복이나 풍습을 많이 받아들였다. '오랑캐와 다름없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문화가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흐른 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만주의(그것도 문명에서 더 멀고, 더 기후가 척박한 동만주 베이스)[* 청나라의 만주족은 문명과의 거리가 가까운 서만주 베이스였기 때문에 중원의 경제체제에 상대적으로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 자연환경에 맞게 [[반농반목]]을 해왔던 여진족의 경제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 중원 관내에서 유목이 가능했던 환경이 한때 있었으나, 이는 주나라 때 끝났다.] 너무나도 빨리 농경으로 바뀐 탓에,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났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땅을 가진 여진족과 땅을 가지지 못한 여진족'''이 나타난 것이다. 땅없는 여진족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건 아니면 그냥 부랑민이 되건 해야 할 텐데 양쪽 모두 결국 부유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금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명색이 지배민족인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에게 줬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다보니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금세종 시기에는 한족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증가했다. 땅에 등급을 매겨 세금을 거뒀는데 문제는 높은 세금을 내는 등급은 한족이 많이 배정되었다. 그나마 금 세종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매겨보려고나 했지 그 이후는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금나라 이전의 [[요나라]]의 경우는 [[연운 16주]]를 차지했지만 그곳이야 중원의 북동부 가장자리 일부였고 기본적으로는 북방의 국가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소위 한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목 국가의 성격이 강해서 이런 내부적 혼란은 비교적 덜했다. 반면 금나라는 근본이 어찌되었건 아예 중원 깊숙히 들어와서 뿌리를 박은 만큼, 이런 부분에서 혼란은 필연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술한 것처럼 한족들에게 자신들의 옷과 변발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러한 혼란을 더욱 심하게 겪었다. 청나라는 금나라와 달리 중국 남부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했으며 금나라의 여진족보다도 더욱 오랫동안 중원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이 점은 독특하게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북위]]와는 다른 점인데, 북위도 화북왕조+한화라는 점에서는 금나라와 유사했지만, 한화에 있어서만큼은 북위는 중앙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른 반발도 많았던데 비해, 금나라는 중앙정부는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면서도 한족 위주로 돌아갔다는 것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면서도 결국 선비족의 반발을 샀고 금나라는 한족의 반발을 샀다. 그나마 금나라는 이게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는데 북위는 이것이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금나라에 의해 조국을 잃은 [[거란족]]들도 복잡했다.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 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어떻게든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적어도 거란족은 여진족처럼 북방 유목민족이란 데서는 여진족이 한족보다 더 가깝긴 했다. 원래부터가 국경 하나 넘으면 있기도 했고. 물론 그런 점이 금나라 치하 거란족의 반여진족 감정을 완전히 커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가까운 정도로 따지면 훗날 금나라 치하의 거란족이 대거 투항하게 되는 [[몽골 제국]]의 [[몽골족]]이 더더욱 거란족과 가까웠다.]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 여진. 금사에서는 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 결혼. 즉 여진-거란 간의 [[통혼]]과 [[혼혈]]을 의미한다.]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 >─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 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금)|장종]](金章宗)은 마침내 거란 문자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그 결과 거란족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당시 저 멀리 서방에 과거에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 데 영향이 있을 것이다. 또한 국제 정세의 문제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송과 1:1 대결은 쉽지 않은 상대인데, 그나마도 국력을 남송에 집중시키기엔 몽골 부족들도 견제해야 하는데다 무엇보다 '''고려'''가 있었다. 비록 고려가 칭신하며 숙이고 들어왔다지만, 그 고려가 [[고려의 여진 정벌|'''17만 대군을 동원해서 여진을 공격한''']] 일이 정강의 변 기준으로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고, 고려의 칭신을 주도한 인사는 저 당시 선봉에서 활약하며 군공을 세운 척준경이었다. 금나라 입장에선 빈틈을 보이면 고려가 언제라도 태도를 돌변할 수 있다는 의심을 안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금나라는 시종일관 고려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나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