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나라 (문단 편집) === 칭신 === 금나라는 1125년, 마침내 요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고 요나라를 끝내 멸망시킨다. 이에 인종은 1126년 3월 신묘일에 모든 관료를 소집, 금을 상국으로 대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이전까진 서로 호칭 때문에 계속 국서를 거절해왔다. 인종 3년 5월 임신일 조에는 고려가 보낸 국서엔 표문이라 하지도 않고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고 해서 거부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인종(고려)|인종]]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고려사 인종 세가에 따르면 토론 당시 모든 신하가 반대했으나 오직 이자겸, 척준경만이 동의했다고 한다. 같은 달 을미일엔 종묘에 점을 쳐서 물어보았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정말 반대가 극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금나라에 숙이기로 결정, 1126년 4월 정미일에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칭한다. 보면 알겠지만 계속해서 질질 끌어오던 호칭 문제가 두달만에 결정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일단 국왕이 더 이상 숙, 예종 처럼 강경파가 아닌데다가 금이 요를 없앨 정도의 국력임을 인식하여 빠르게 결정했을 것이다.[* 특히 고려가 금에 숙인 이듬해 1127년 [[정강의 변]]이 발생하며 금은 송으로부터 개봉을 비롯한 화북 지역을 탈취하는데 이 과정에서 금나라의 체급은 이전의 요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요와 금은 비슷한 이미지와 달리 체급의 차가 무척 컸는데 요의 인구는 400~500만 수준으로 고려에 비해서도 그닥 우위를 점하지 못한 반면 북송의 절반을 차지한 금의 인구는 4000~5000만 수준으로 정주 인구에서조차 남송에 아주 큰 열세가 아닌 나름 대등한 수준이었다.] 그 여진족과 칼을 맞댔던 '''[[척준경]]'''이 앞장서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금나라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정권을 주도하는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에 금이 갈수도 있으니까. 허나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 반발이 컸다. 무엇보다 당장 같은 해에 이자겸은 쫓겨난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 9년(1131년) 9월 정유일에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돼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천 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라고 떠들고 다녀서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삼일동안이나 간쟁했으나 인종은 끝까지 그를 임명시켰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경우엔 그들은 우리 조정의 부속이고 늘 조천(朝天)[* 제후가 천자를 만나러 가는 것을 이른다.]해오던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가 숙일 수 있냐며 아주 분노했다고 묘지명은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 조정이 이미 정한 금나라와의 관계를 되돌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요나라 멸망 직후 칭신한 바로 다음해인 1127년(금나라 천회 5년)에 [[북송]]이 금나라에게 멸망 직전까지 몰려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고려-북송 관계]]를 참고. 금나라는 고려가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이전에 이미 빼앗긴 보주([[의주군|의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참고로 이 보주성 반환 도중에 금나라에선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선 '''이미 다 죽였다(...)'''고 사실상 반대를 뜻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