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5세기 이후 ~ 532년: 금관국의 잔존과 멸망 === 경자년 고구려와의 전쟁 등을 거치고 5세기에 이르러, 고고 자료로 보면 이후 [[가야토기 #s-2.1|금관 가야 양식이라 할만한 토기]]는 거의 사라지며, [[신라 토기]]의 변방 양식으로서 김해 양식만 준별될 뿐이다. 그리고 그 뚜렷하지 않은 토기양식 역시 고 김해만 일대로 한정되어 영향력 약화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심지어 현재 김해 대동면에 있는 예안리 고분군 같이 낙동강 서안 지금의 김해시 땅인 곳에도 4세기 말 이후로 신라 토기가 침투해, 이를 신라가 낙동강 서안의 요충지까지 확보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5세기부터 김해에서는 왕묘라 할 만한 무덤의 축조가 중단된다. 소형 석곽분은 계속 축조되지만 이전 전성기 왕묘급 탁월한 대형 고분군은 실종된다. 그리고 금관 가야계 문화를 유지하던 [[성주군|성주]], [[창녕]]이나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은 거의 [[틀:신라의 고총 고분군|완벽한 신라 스타일의 고분군으로 전환]]되며, 이후 연산군 고분군의 축조로 이어져 고총화[* 고총이란 20m 이상의 고분을 이르는 것으로, 고총화했다는 것은 거대 고분들이 등장한다는 뜻. 자세한 것은 [[고분문화#s-2.3|고분 문화]] 문서를 참조.]된다. 이를 보고 아예 금관국이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멸망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대형묘가 축조되고는 있고, 결정적으로 사서에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후 가야 세계의 주도권은 백제의 혼란을 틈타 [[호남]] 동부 등 [[섬진강]] 유역을 확보한 [[고령군]]의 [[반파국]]에게로 넘어갔으며, 이곳이 가야, 가라, [[반파국|대가야]] 등으로 불리며 가야를 대표하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반면 5세기 ~ 6세기에 이르러서 금관국은 '남가야', '남가라' 등으로 표기된다. 그만큼 북쪽의 [[반파국|대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진 모습을 호칭에서부터 반영하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금관 가야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토기는 사라지며, 창녕계나 소가야계 토기, 그리고 이동양화된 지역 토기들이 등장한다.]. 5세기부턴 대가야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금관가야가 위치상 당연하게 맡아왔던 일본 방향 교섭마저 대가야에 주도권을 빼앗긴 정황도 나타난다.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금관국이 일시에 멸망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당치도 않다. 대성동 고분군에는 5세기 이후의 고분이 조사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대성동 73호분은 5세기 2/4분기에 해당하는 대형 석곽묘이다. 함안과 대가야에 비하면 중형급 고분인 점에서 5세기 중엽 금관국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면서도 반파국이나 안라국보다 열세인 점을 알 수 있다.], 왕성인 봉황 토성[* 봉황대와는 다르다. 현재의 봉황대는 봉황 토성 안의 내성이거나, 구릉으로 보인다.]을 방어하기 위한 북쪽 감제 고지에 나전리 보루가 축조되었고 여기서 나온 토기가 6세기 전반 토기라는 점에서 금관 가야가 계속 봉황 토성을 중심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라]]에게 밀려 532년 11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다른 가야 국가들은 백제가 살려 보려고 애쓴 것과 달리 금관국은 백제가 그럴 틈도 없이 멸망했는데, 5세기 이후 이미 낙동강 서안에 신라의 교두보가 존재해 온 (백제 입장의) 원격지인 데다가 [[부여시|사비]] 천도 등으로 인해 백제가 정신이 없었던 탓이 큰 듯. 그러나 금관국의 멸망은 백제에 지리산 ~ 낙동강 동안 일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비'''공식적으로 '''한국사 최초로 불교를 들인 국가'''이다.[*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 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공식적으로 받기는 힘들다.] 단,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늦게 잡아도''' 고구려, 백제 다음으로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한 '''3번째 국가'''다.[* 질지왕 시절 허황옥의 명복을 빌고자 김해시 [[응달동]] 일대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이 당시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나기 전이다. 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이기 때문에 수용한 건 최소 그 이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