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 (문단 편집) === [[고구려]] 금관 === [[파일:2011122427198454.jpg]]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파일:고구려 금관.jpg]] '''평양 청암리토성 출토 ‘불꽃 뚫음무늬 금동관’''' [[https://m.cafe.daum.net/alhc/7h/262|출처]]. 이 금동관은 보살상의 보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https://blog.naver.com/dndudwp99/221341029008|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은 [[강서군]]지역에서 발굴되었다고 하여 '''전(傳)강서 금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즉 이 유물은 '고구려 고분에서 나왔다'는 증언만 있지 [[도굴꾼]]이 몰래 파내서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드러난 유물이라서 정확히는 어디서 출토되었는지 유래가 불분명하다. 한반도 남부의 금관보다는 아래에 나올 중앙아시아 금관과의 디자인적 유사성도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고구려 관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 전강서군금관은 가야 금관처럼 출토 장소를 알 수 없었으나 일제강점기 때의 묵서를 보고 강서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한다. 2011년 [[상명대]] 박선희 교수는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에 관련된 책을 썼는데 소유자 K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 금관은 [[일제강점기]] [[강서군]]에서 도굴 형태로 발굴되었으며, 원산에서 사업을 했던 소유자의 조부가 한 일본인으로부터 이 금관을 사들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묵서의 위조도 없으며 금관은 금 70%에 구리가 섞여있어 현대에 제작된 것이 아니며 제작 시기는 4~5세기로 금관 제작 시기로 추정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아직 강서금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도 아직 강서금관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으며, 강서금관 관련 논문들도 대부분 박선희 교수의 저작들이며 다른 교수들에 의해 충분히 연구되지도 않았다. 다른 고구려 금동관과도 외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 금관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계에선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이 있는 고구려 무덤의 금관은 6종류이며 도굴 분실등으로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강서금관이 진품이라면 그 중 하나가 발견된 셈이다. 그러나, 강서금관의 조형미가 한국 다른 지역의 관보다는 오히려 아래 소개할 아프가니스탄 금관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진품 금관이더라도 고구려의 것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금관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각에서는 백제 금동관 절풍과도 비슷하여 최초로 발견된 백제 금관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되면 백제의 영토를 평안 강서군인 평양 근처까지 확대시켜야되는 문제점이 있어 백제 금관은 아닌걸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이 금관의 소유자 K씨는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소유한 인물로서, 지역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등에 수많은 문화재를 기증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러한 컬렉터의 소장 유물이기 때문에, 진짜 고구려의 금관인지는 몰라도 어느정도 신뢰가능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간송 [[전형필]]의 컬렉션 [[독서여가]]도 위작논란이 나오고 있지만.. 흔히 전 강서 화염문 금관만을 떠올리지만 전 집안 출토, 집안 출토 금동관과 같이 우모형(牛毛形) 장식의 금동관들도 많다. 위의 신라 금동관의 의성 탑리 4호분 출토 금동관이랑 거의 같은 형태이며, 황남대총 북분 출토 은관 역시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영향 또는 관계망 속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별개로 북한에도 고구려 금관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존재하는데 바로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4, 5세기경의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다. 띠 모양의 테두리 윗줄에는 인동초무늬를, 아랫줄에는 구슬무늬를 새겼고, 그 사이에 7개의 나뭇잎 장식을 넣었으며 테두리 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나 바람에 세차게 날리는 구름 같은 무늬를 새긴 9개의 세움 장식(입식·立飾)으로 표현돼 있다. 이는 우리 눈에 익은 백제 무령왕의 금관 장식과 유사하다. 또한 세움 장식 가운데는 가장자리를 불꽃무늬 대신 가위로 오려낸 다음 비틀어 꼬아 장식한 종류도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 장신구만의 특징적 기법이다. 맨 아래쪽 좌우에는 마치 옷고름과 비슷한 드리개를 별도로 만들어 길게 늘어뜨렸다. 물론 이 금동관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위의 '''전(傳)강서 금관'''처럼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이 썼던 실용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어찌되었든 전문가들은 고구려의 금동관이 신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으며, 4세기 말∼5세기 초 신라 무덤에서 나타나는 황금문화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그 기원은 고구려였음이 분명하다고 한다. 고구려 금동관의 특징적 요소인 금동판을 뚫어 무늬를 만드는 투조(透彫) 기법이나 촘촘히 오려 꼬는 방식 등은 신라 금관에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http://www.donga.com/news/List/Series_70070000000725/article/all/20050503/8186074/1|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