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문단 편집) == 배경 : 공산주의의 약화 ==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s-2.2|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s-2.3|스탈린주의]], [[공산주의#s-2.4|마오주의]] 혹은 그 외의 어떠한 형태이든,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내재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점차 가속화되는 몰락의 중심에는 공산권의 핵심인 [[소련]]이 있었다. 소련은 관료제 사회의 내재적인 계급모순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론적으로 정치사상적인 면에서의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한다면 [[공산주의]]는 자유를 제한하는 대가로 평등을 추구한다. 실제로 서방세계의 다수 국가들은 '''"비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공산주의가 그럭저럭 돌아가게나마 하는 원동력은 청백리같은 [[노멘클라투라|고위 간부들]] 때문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론은 소위 '공산귀족', 즉 [[노멘클라투라]] 계급의 부상으로 철저히 논파되었다. 물론 당시의 관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서방의 [[68혁명]]의 여파로 헝가리[* 사실 1956년에 일어난 일이라 68운동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이때의 [[임레 너지]]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지만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와는 다르게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검토 하는 등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기에 흐루쇼프가 위신실추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정권을 뒤엎게 된 것.],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참조], 폴란드[* [[폴란드/역사]] [[레흐 바웬사]] 참조. 단, 폴란드는 1950년대 중반에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타 공산권 국가에 비하면) 온건파가 집권했었기는 했다. 경제가 침체일로에 벗어나지 못했다는게 문제지.]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개혁적 시도들은, [[동유럽]]권의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소련의 강경노선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로는 사실상 의미있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다. 더하여 이러한 강경노선은 동유럽의 공산정부가 가졌던 '''최소한의 지지와 정통성마저 상실'''하는 연쇄작용을 불러왔다.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만이 공산정권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경제 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식 공산주의 및 계획경제가 제3세계에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이 단기간에 '''가난한 농업국에서 세계 2위의 공업국[* 1위는 [[미국]].]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 참조].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련은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이 1%에서 2%를 웃돌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은 수출품의 38%가 천연가스, 나머지는 중공업, 화학 제품이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181024202238/http://rus-stat.ru/stat/1931998_6.pdf|"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2018년 10월 24일 확인] 막대한 군비경쟁도 문제였다. [[OPEC]]의 [[오일쇼크|석유 가격담합]]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시적으로 호황을 누린 소련[* 쉽게 간과할 수 있겠지만, 소련-[[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 생산국이다.]은, 마침내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영에 대항하여 석유 생산을 급속히 늘리는 바람에 석유값이 급속하게 떨어지자 경기기 다시 후퇴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을 강요당했던 반면, 미국은 서서히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중앙계획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소련 및 일부 위성국들에서는 1980년대 초 일시적으로 경기 회복현상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1981년에서 1984년간 외채가 약 35~70%가량 하락], 근본적인 개혁이 실패한 이상 이러한 호조가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 p.41] 개혁에 실패한 관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고는 고작해야 영토 내에 묻혀 있는 천연자원들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해나갈 돈을 벌면서,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생활고와 역사적 민족감정이 맞물려 점증하는 '''자국 인민들의 불만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억제'''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이제는 [[공산주의]]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들조차 현 체제가 [[자본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