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문단 편집) === 소비에트 연방에 미친 영향 === 소비에트 연방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던 사회주의 공화국들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던 일부 개혁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던 반면, 예상외로 '''대다수의 소련 인민들에게는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자신의 경험도 그의 행보에 영향을 주었다. 혁명 영웅이던 [[블라디미르 레닌|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무학(無學) 광부로 출세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오오 인간승리~~, 공산당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제철소 기사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와는 달리, 고르바초프는 국립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 계층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기존의 서기장들과는 달리 서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급진적인 개혁안만을 내놓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급격한 체제 변화에 대한 혼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1920~30년대 사이 나름대로 짧은 시기로나마 비공산주의 국가였었던 [[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ㆍ[[불가리아]]ㆍ[[유고슬라비아]] 등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한때 공산권에 속해 있었던 동유럽의 국가들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군에게 두들겨 맞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정치 권력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중 동유럽 일대로 밀고 들어온 소련 군대에 의해 원하지 않게 공산주의 정치를 강요당했다.] 대다수의 소련인들[* [[독소 불가침조약]]과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확장된 일부 영토는 제외.]은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멸망 이후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소련]]으로 이어지는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 말기에는 초고령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났던 사람들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서기장 자신도 소련인으로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서기장이었고.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던 [[1985년]]을 기준으로 40세 이상의 모든 폴란드인들이 비(非) 공산주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가 공산체제 하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1956년, 1970년) 정권을 뒤엎은 경험까지 가졌던 반면에 68세 이하의 모든 본토 출신 소련인들은 공산주의 외의 사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당대 소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혁명]]이란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대다수 소련인들이 정권과 정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구 사회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삶의 질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들은 유가 폭등으로 막대한 흑자를 벌어들인 [[70년대]] 말을 즈음하여 국민적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던 기억을 잊지 못했고, 당시의 [[정치적 무관심|실질적인 국가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고, 설령 알 수 있더라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일반 대중에게 지지받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혁신적인 삶의 질 향상이 뒤따라야 했으나, 이미 석유값이 고점에 비해 절반에 못 미치던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