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근회덕 (문단 편집) == 생애 == 근회덕의 할아버지 근창범(靳昌範)은 전중승(殿中丞)을 지냈으며, 아버지 근은(靳隱)은 우성현령(禹城縣令)을 지냈다. 근회덕은 명법과(明法科)에 급제하여 광안군(廣安軍) 판관으로 처음 부임했다. 뒤에 임기가 만료되면서 홍려시승(鴻臚寺丞)으로 제수되고 저작좌랑(著作佐郞)·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상주통판(相州通判)을 역임했으며, 전중승·광주통판(廣州通判)로 전임되고 국자박사(國子博士)·창주통판(滄州通判)으로 옮겼다. 또한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을 역임하고 다시 막주통판(莫州通判)과 지덕주(知德州)를 역임했다. [[진종(송)|진종]] 함평(咸平) 연간에 [[요나라]]가 북송을 침범하자, 근회덕은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고 전운사(轉運使) 유통(劉通)이 근회덕의 선정에 대해 언급하여 진종이 여러 차례 근회덕을 칭찬하였다. 뒤에 근회덕은 지밀주(知密州)로 부임하려다가 때마침 유후(留後) 공수정이 밀주에 진수하자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이윽고 염철사(鹽鐵使) 진서와 판관 왕제가 근회덕의 군사적 재간을 추천하여 근회덕은 여경사(如京使)·지공주(知邛州)로 전임되었다. 근회덕은 처음 이름이 상(湘)이었고 이전에 [[구준(북송)|구준]]과 교유한 적 있었다. 경덕(景德) 연간에 구준이 재상이 되자 이름을 회덕(懷德)으로 고쳤는데, 이는 구준의 아버지 구상(寇湘)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근회덕은 지창주(知滄州)로 부임했다가 대중상부(大中祥符) 연간 초에 조정으로 복귀하다가 다시 창주로 부임했다. 당시 창주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전운사 이사형(李士衡)에게 근회덕이 창주에 남아서 선정을 펼쳐달라고 요청했고 이사형이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뒤에 문사사(文思使)로 전임되었다. 1010년 가을 강남의 가뭄으로 인해 홍건등10주안무도감(洪虔等十州安撫都監)으로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 직전에 지조주(知曹州)로 전임되었다. 1011년, 익주검할(益州鈐轄)로 선임되고 장주자사(長州刺史)를 겸임하였다. 근회덕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강건함과 유능함으로 칭송받았지만 술에 취해 잘못을 많이 저질렀으며, 진종도 근회덕이 부임하기 전에 이를 타일렀다. 뒤에 북작방사(北作坊使)로 옮겼고 촉(蜀) 지방에서 군인과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근회덕은 다시 입조하여 서상합문사(西上閤門使)로 임명되고 소주자사(昭州刺史)를 겸임하다가 지전주(知澶州)로 전임되었다. 근회덕은 수륙의 요충지인 전주에서 선정을 펼쳤으며, 지섬주를 맡았다가 1017년 조정으로 복귀했다가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