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근친상간 (문단 편집) ==== 레비스트로스의 학설 ====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에도 일정한 원리가 있다고 기술한다. 이 원리는 교차사촌과 평행사촌간에 근친혼은 차이가 있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평행사촌은 나를 기준으로 아버지의 형제(큰아버지, 작은아버지)의 자식이나, 어머니의 자매(이모) 이며, 교차사촌은 아버지의 자매(고모)의 자식이나, 어머니의 형제(외숙)의 자식으로, 모든 관련 구조 속에서 교차사촌끼리는 결혼이 가능한 곳이 있으며, 평행사촌간에는 근친혼이 그 어느나라, 부족에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유럽의 왕실도 이러한 계통을 따르고 있다. 사실 레비스트로스가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된 까닭은 다름아닌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실존주의(?)는 시대적 사명([[시대정신]])을 읽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고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이러한 시대정신을 과연 누가 규정할 것인가 하는 주체의 문제는 실존주의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거기에 시대정신이라는 단어에는 각 시대에 따라 요구받는 올바름, 정의 같은 가치들이 달라진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순신]] 장군의 경우 일본에 맞서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함대전을 펼쳐 국난을 해쳐나간 중세의 영웅이며 왕의 명령에 충성한 헌신의 화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들이대어 이순신을 전제군주의 앞잡이로 평가하는 경우는 제정신 박힌 곳에서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시대정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 따르면 인간은 각자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에서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행위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되며 이 기준이나 가치는 역시 시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지면 옳음에 관한 [[상대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시공간이 달라짐에 따라 바뀌어가는 시대정신의 변화야말로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반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바로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지 않는 생활 양태가 존재한다면 어떨까"라는 가설이다. 현대인의 역사의 시계가 과연 멈춘 것인지 앞으로도 힘차게 전진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아는 것이지만 가설에 따르면 '변화'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농업 혁명]]과 [[문자]]의 발견에도 그 대열에 참여하지 않고 태고의 생활을 여전히 영위하고 있는 원시 부족이다.[* 사실 지금의 원시부족들은 아무리 오지라도 외부 문물을 받아들였거나 인지한 상태다.] 이렇게 변하는 것이 없다면 시대정신이 과연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지, 원시 부족의 주민들은 소위 '정상인'으로서의 가치가 부재한 것인지가 문제된다.[* 물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왜냐면 원시부족들은 숫자에서나 특성에서나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논리의 한계는 그런 식으로 시대정신의 적용 여부를 따진다면, 적어도 변화를 하는 사람들인 세계 인구 대다수 '문명인'에게는 시대정신이 따라야 할 것이 되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한계가 있는 가설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