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근초고왕(드라마) (문단 편집) === 그나마 호평받을 만한 점 ===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1화만 본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왜 망작이 되었는지 이해를 못한다. 스토리와 역사적 사건 재현은 개판인데 소품과 배경, 언어는 열심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갑옷을 비롯한 각종 복식과 생활상의 재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삼국시대 드라마가 보여준 개판 재현과 다르게 크게 일신된 면모를 보여준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_4e97ba99e7a6b.jpg|width=100%]]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34e97ba711c48f.jpg|width=100%]] || || 드라마 근초고왕의 백제 조정 || 드라마 근초고왕의 위례궁 ||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_4e97ba7dec48f.jpg|width=100%]]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_4e97ba9911a6b.jpg|width=100%]] || || 고구려 무용총의 접객도 || 드라마 광개토태왕(잘못된 재현) || 회의나 연회와 같은 여러 공식석상에서 각 신료들이 모두 개인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는 등 입식생활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는 고분벽화를 바탕으로 사료의 내용을 충실히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백제의 일각에서는 무릎을 꿇거나 책상다리로 앉아있는 등 좌식생활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역추적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북방계(부여), 후자는 남방계(삼한)의 생활상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이것만으로도 고대적인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아났다.''' 이는 나중의 [[대왕의 꿈]]이나 [[칼과 꽃]]의 좋은 선례가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사람이 현대 서울말 쓰는 작금 유사 사극들과는 달리 사극 특유의 고풍스러운 대사들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다. 주서(周書)의 기록에 따라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어라하]]'라는 단어를 충실히 복원해서 쓰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정성희 작가의 전작 [[자명고]]에서도 백두산을 가리키던 '불함산'이라는 말을 복원해서 "은혜가 불함에 닿았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했음을 상기하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만 이와 비교되게도 왕비를 가리키던 '어륙'은 왕후니 왕비니 하는 중국식 용어에 밀려 등장하지 않았고, 기층민들이 왕을 가리키던 '건길지'는 길지(키시)가 존칭인지도 몰라서 아지키시(아직기)를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병맛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 백제에서 [[한강]]을 가리키던 이름인 '욱리하'를 사용하였다.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44.jpg|width=100%]] || |||| 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구려옷 ||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고구려관모_1.jpg|width=100%]]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백제관모_1.jpg|width=100%]] || || 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구려 관모 || 드라마 근초고왕의 백제 관모 || 의상도 기존의 삼족오와 인동초 일색에서 벗어나 격자무늬, 와당무늬, 불꽃무늬와 같은 다양한 문양을 접목시킨 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된다. 고구려의 관모는 사료에 근거하여 왕이 쓰는 백라관(白羅冠)과 대가들이 쓰는 책(幘)을 구현하였으며, 백제의 관모로는 오우관으로 흔히 알려진 변(弁)과 관식을 전면적으로 사용하여 역시 당대상에 가까운 훌륭한 재현을 보여주었다. 다만 고구려의 책은 사료에 근거하여 위의 덮개(屋)가 없어야 하는데,[* 이는 중국의 양관(梁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양관을 둘러싸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 책(幘)이며, 이것이 점차 대형화되면서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격으로 하나의 독자적인 관모처럼 취급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금관조복을 통해서도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구현되었고 구현된 것도 실제 재현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물론 그런데도 엉망진창인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이나 [[대조영(드라마)|대조영]]의 관모와 비교해보면 이쪽이 월등히 우수하다.'''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_4e97ba7dece8f.jpg|width=570]] || ||<|2> 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국원왕 || 통구 12호분 벽화 ||<|2> 드라마 [[주몽(드라마)|주몽]]의 주몽(잘못된 재현) || || 쌍영총 벽화 || 갑옷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갑옷 재현은 모든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물론 갑찰의 수결법이나 형태 등 세부적인 부분[* 고국원왕의 종장판투구가 만곡형이 아니라는 점이나 목가리개가 탈착식인 점, 흉갑과 대퇴, 하퇴갑의 갑찰이 외중식으로 교차하지 않고 타일처럼 가지런히 붙어있는 점, 상박갑의 갑찰이 내중식인 점 등 자잘한 오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 옆 사진의 주몽에 비하면 더없이 훌륭한 재현이다.''']은 오류가 있고, 부분적으로 [[대조영(드라마)|대조영]]의 갑옷이 재활용되긴 했지만, 새로 제작한 갑옷들은 찰갑의 전체적인 형태를 재현에 맞추어 매우 훌륭하게 재현한데다가 투구 역시 최대한 벽화에 맞추어서 '''백제가 주연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더욱이 고구려군 병사들의 모습도 벽화에 맞추어서 잘 재현되었고 갑옷도 일신되는 효과를 맞았다. 그러나 후속작 [[광개토태왕(드라마)|광개토태왕]]에서는 이처럼 훌륭한 재현을 보인 근초고왕의 갑옷을 모두 버리고, 대조영과 천추태후 때부터 지겹도록 우려먹었던 중국식 갑옷, 아니, 중국식 갑옷도 아닌 정체불명의 판타지스러운 갑옷을 재활용하는 악수 중의 악수를 두고 말았다. 그나마 다다음 후속작인 [[대왕의 꿈]]에서 목가리개가 갑옷과 일체형으로 나와 재현에 좀더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사용됐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0120821_4e97777dece8f.jpg|width=100%]] || ||<|2> 드라마 근초고왕의 비류왕과 부여구(나중의 근초고왕)의 갑옷 || 광주 출토 투구 || || 고흥 출토 갑주 복원품 || 다만 백제의 갑주에 대해서는 너무 일본풍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 갑옷의 경우 애당초 자료가 빈약하기도 하거니와 한반도 남부의 고대 갑옷들이 대부분 판갑 형식이라 드라마에 나오는 갑옷이 반드시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의 일본과 한반도 남부가 공통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이다.[* 일본과 한반도 남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판갑(단갑)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단갑의 기원인 목갑이 출토되었고, 단갑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계속해서 출토되었으므로 일본에서 기원한 갑옷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는 판갑들은 후기의 완성된 양상의 유물들만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제철 기술이 없었으므로 철갑옷은 당연히 한국제라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의견인데, 일본이 가야 및 백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철괴를 수출하여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나지만 일본에서 갑옷의 기본적인 형태는 이 모습을 유지해왔다. 일본 자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 갑옷]]의 모습을 차용한 중국 [[삼국연의(1994)|84부작 삼국지]]와는 경우가 다르다. || [[파일:external/www.anewsa.com/20101119184127.jpg]] ||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helmet_.jpg]] || || 드라마에 나오는 근초고왕의 갑주 ||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전형적인 소찰주들 ||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 제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류왕이 사망한 뒤의 극 중반부에 들어서는 판갑과 찰갑을 결합한 형태의 갑옷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판갑이 백제의 갑옷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고, 실제로 당시 백제의 근거지이던 한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 판갑(단갑)의 최북단 출토지는 화성 사창리고분군과 음성 망이산성이며, 그 이북에서는 더 이상 판갑이 출토되지 않고 있다. 한편 몽촌토성에서는 뼈로 만든 찰갑편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단갑의 기원인 목갑이 출토된 것처럼 한강 유역에서는 찰갑의 기원인 골갑을 발달시켜 왔음을 증빙한다.[br][[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one.jpg]]]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찰갑으로 자현하는 게 '''더욱 정확한 재현이다.''' [[http://blog.naver.com/superman2208/memo/220074075706|#]] 또한 이러한 갑옷 재현의 변화와 더불어 백제의 투구도 이른바 '일본식'의 미비부주에서 소찰주(小札胄)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소찰주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는 양상이 확인되는 만큼 백제가 그 중간과정에 있을 것이 유력시되기에 '''가히 적절하고 유효한 재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투구를 구성하는 찰갑편들을 끈으로 엮지 않고 리벳으로 고정시킨 점은 옥의 티. [[http://blog.gorekun.com/1333|#]] 이러한 갑옷들은 역시 이후의 [[대왕의 꿈]]에서 백제의 갑옷으로 활용되어 역시 이후의 드라마들에 좋은 선례가 되었다. 더불어 이와 관련해 근초고왕의 요서경략 부분에는 진성과 고평성을 수비하는 조군의 모습이 일부 중국에서 제작된 [[적벽대전(영화)|영화 적벽대전]]의 것을 수입한 것이어서 주목되는데, 애초에 [[적벽대전(영화)|영화 적벽대전]]의 갑옷이 남북조 시기의 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이를 놓고 보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후 [[전연]]의 갑옷은 대조영 시기 당나라의 갑옷을 그대로 재사용했는데, 이는 이후 [[광개토태왕(드라마)|광개토태왕]]에서의 흑역사 재현으로 이어지니 도저히 좋게 평가해줄 수가 없다. 선비족 연나라의 갑주는 차라리 고구려의 갑주를 차용해서 쓰는 것이 옳은 재현이다.[* 선비족은 고구려와 충돌과 친선을 거듭하며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외교적인 갈등과 별개로 문화적으로는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을지문덕]]이 고구려화된 선비족 혈통이었을 거라는 추측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굳이 연나라 갑주를 중국풍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면 고구려 갑주와 고대 중국풍(특히 [[삼국시대(중국)|중국 삼국시대]]~[[서진]]) 갑주의 중간 형태로 묘사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