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런지 (문단 편집) == 역사 == 그런지의 뿌리는 1970년대 후반 등장한 [[하드코어 펑크]]이다. 당시 미국 인디 신에서는 하드코어 펑크 열풍이 불었고 미 전역의 도시에서 펑크 밴드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는 [[시애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애틀은 당시 하드코어 펑크의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뉴욕]] 등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근처에 자체적인 인디 신이 등장할 만큼의 대도시도 없던 외딴 곳이었다. 이로 인해 시애틀의 하드코어 밴드들은 타 지역의 하드코어 신과는 [[갈라파고스화|전혀 다른 음악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와중에 발매된 [[블랙 플래그]]의 1984년작 [[My War]]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앨범의 '헤비하고 느릿하게 연주된 하드코어 펑크' 사운드는 그런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그린 리버(Green River), U-멘(U-Men), 멜빈스(Melvins), [[사운드가든]] 등의 밴드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하드코어 펑크에 기반했지만 상대적으로 느린 템포에 [[디스토션]]을 잔뜩 먹인 거친 기타 사운드, 우울한 분위기 등 타 지역의 밴드들과는 확연히 다른 고유의 음악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그 특유의 음악성으로 서서히 로컬 신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음반사에서도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5년 그린 리버가 [[익스텐디드 플레이|EP]] 'Come On Down'을 내놓으며 최초로 음악계에 입성, 다른 시애틀 밴드들 역시 연이어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음반이 1986년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Deep Six'와 'Sub Pop 100'으로, 그린 리버를 위시한 당시 시애틀 인디 밴드들의 주요 곡들을 담고 있으며 초기 그런지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시애틀에 위치한 음반사 [[서브 팝]] 레이블[* 그런지 음악의 성공으로 미국 [[얼터너티브 록]]을 대표하는 인디 레이블로 부상한다.]에서는 이 새로운 음악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으며 이들이 그린 리버의 1987년 EP 'Dry as a Bone'를 홍보할 때 사용한 '''그런지(Grunge)'''라는 단어가 곧 이 새로운 장르의 이름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80년대 후반이 되자 장르의 형상이 제법 뚜렷해졌다. 새로운 그런지 밴드들이 제법 인기를 몰고 있었고 이들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밴드들도 여럿 등장했다. 최초의 그런지 밴드였던 그린 리버는 해체 뒤 각각 [[머드허니]]와 [[펄 잼]]으로 분리되었다. 그 외에도 [[앨리스 인 체인스]], 스크리밍 트리스, 마더 러브 본, 태드, 브래드, 그리고 [[너바나(밴드)|너바나]]까지 다양한 그런지 밴드들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시애틀 인디 신에서 서로 상부상조하며 그런지 장르를 확립해 나갔다. 서브 팝의 노력도 빛을 발해 [[영국]]에서 주목받은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대중음악계에 그런지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그런지'라는 용어도 장르의 이름으로 거부감 없이 사용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_8UDylv7WU|1990년의 너바나 인터뷰, 커트 코베인이 밴드를 '그런지 록 밴드'라고 지칭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991년 [[너바나(밴드)|너바나]]의 [[Nevermind]]가 대성공하고, 이어서 [[펄 잼]]의 [[Ten]]도 대성공을 거두며 그런지는 단숨에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런지는 90년대 초중반의 미국 록 음악을 완전히 점령하다시피 했으며, 수많은 그런지 밴드들이 이 붐을 타고 메이저로 진출했다. 기성 록 밴드들이 그런지의 요소들을 차용하기도 했고, [[샌디에이고]]의 [[스톤 템플 파일럿츠]]를 비롯해 미국 각지에서, 심지어 [[영국]] 출신의 [[부시]]나 [[호주]] 출신의 캔들박스까지 시애틀이 아닌 다양한 곳에서 그런지 록을 하는 밴드가 여럿 등장했다. 그런지는 당시 청년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행했지만, 그 유명세가 붙으며 그런지라는 용어는 급격하게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마크 제이콥스]]가 [[그런지 패션]]을 창안했지만 그런지 뮤지션들은 멋이나 스타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별 생각 없이 지갑 사정이 넉넉치 않았기에 아무 옷이나 골라 입은 것 뿐이었다. [[MTV]]를 비롯한 언론 매체에서는 연일 그런지 열풍을 보도했고,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런지[[게이트]]라는 대형 [[오보]]를 내기도 했다.[* 1992년 뉴욕 타임즈에서 시애틀의 그런지 신을 취재하여 이들의 생활, 패션, 인생 철학 등을 소개했지만, [[가짜 뉴스|사실은 시애틀 근처에 간 적도 없었고 다 지어낸 뻥이었다.]]] 기존 그런지 음악가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던 물건들이 그런지 이름을 달고 팔려나갔고,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런지라는 명목 하에 각종 기행을 저질렀다. 한편 기존 시애틀 인디 음악계에서는 신예 그런지 밴드들이 사멸해 버렸고, 아예 그런지라는 단어 자체가 비웃음거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기존 그런지 밴드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에 메이저에 오른 많은 밴드들은 그런지 음악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자신들을 그런지라는 장르 아래로 묶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그런지 음악은 점차 유행에서 벗어났다. 많은 밴드들이 성공 후의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약물 중독이나 [[소포모어 징크스]]에 빠졌으며, 그런지 자체가 지나치게 대중에게 노출되며 이미지가 빠르게 소모된 것도 있다. 이후 빈 자리는 [[포스트 그런지]]의 인기가 이어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