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단스크 (문단 편집) === 전후 (1945 ~ ) === [[얄타 회담]]을 통해 연합국은 전후 단치히를 '그단스크'로서 폴란드에 완전히 넘기기로 했고 [[포츠담 회담]]에서 이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 그단스크는 다시 폴란드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13만 가량의 독일인들은 [[1950년]]까지 모두 추방되었다. 이후 [[1952년]]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구시가지의 일부가 폴란드 장인들에 의해 수준 높게 복원되었는데, 이 도시를 다시 복원하는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 도시를 과거의 독일스러운 도시보단 현대적인 도시로 재건하길 원했지만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 인민정부]]는 도시가 '다시' 폴란드와 통합되는 걸 상징하기 위해서라도 구시가 일부분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현재의 성 마리아 성당 주변, 드우가 거리, 그리고 모트와바 강변의 꽤 넓은 지역을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의 원형은 전쟁 직전의 모습이 아닌, [[1793년]] 이전 도시가 연방의 일부로서 잘 나가던 시절로 하였다. 복원 도중에 독일인과 프로이센의 흔적이 보이면 종종 무시되었고 심하게는 '프로이센 반달리즘'으로 인식되어 파괴하기도 했다.[* 의외로 [[귄터 그라스]]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은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도시의 복원수준은 매우 양호했고, 그단스크의 구시가는 매년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은다. 재건의 과정에서 도시의 인구는 순수 폴란드인들로 급격히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구시가 주변의 [[도심]]은 [[공산주의]] 특유의 칙칙한 성냥갑 형태 건물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 내에서 그단스크는 주요 공업도시의 위치를 차지했다. 전후 [[1946년]] 폴란드 인민정부는 이곳에 레닌 국영 [[조선소]]를 설립했고(공산 정권 붕괴 후 현재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개명했다) 폴란드의 조선 산업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공산 정권 시절, 약 2만 명의 노동자가 이 조선소에서 일했고, 따라서 이 도시는 가히 조선 노동자들의 도시였다. 이 노동자들은 이후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1970년]]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의 실정으로[* 경제 침체에 시달리다 결국 생필품 값을 기습적으로 인상했다.] 불만에 차 있던 그단스크 노동자들은 이 도시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고무우카의 오른팔이던 [[제논 클리슈코]](Zenon Kliszko)가 군대에 발포명령을 내려 41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분노한 폴란드 시민들에 의해 이 [[시위]]는 슈체친, 엘블롱크, 그디니아 등 폴란드 북부의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고, 결국 14년간 폴란드를 통치하던 고무우카는 실각하게 된다. 10년 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조선공이던 [[레흐 바웬사]]는 노동 환경도 열악한 가운데 인민정부가 또 임금 인상 없이 생필품 값을 올리자 조선소 노동자들을 규합해 [[1980년]] [[4월]] 대대적인 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 파업이 그단스크를 넘어 폴란드 각지로 확대되자 폴란드 정부는 그 해 9월, 자유 노조 설립을 합법화했다. 이에 레흐 바웬사는 1980년 [[9월 17일]],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그 유명한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를 결성하여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지친 노동자들을 규합해 반공운동을 이끌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 인민정부와 소련은 이 운동을 탄압하려 했다. [[1981년]] [[12월]] 당내 강경파이던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Wojciech Witold Jaruzelski)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는 [[1983년]]까지 [[계엄령]]을 내려 자유노조를 탄압했다. 그럼에도 레흐 바웬사가 굴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이끈 결과, [[1989년]] 폴란드 공산정권은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솔리다르노시치와 원탁회의를 진행해 민주적인 의회를 구성할 것을 약속했다. 결국 1989년 [[6월 4일]] 첫 민주주의 [[선거]]에서 솔리다르노시치가 압승을 거둬 공산권 최초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단스크라는 도시는 [[공산권]] 붕괴의 첫 시작을 알린 셈이었다. 지금 그단스크에는 이 사건들을 기념하는 솔리다르노시치 박물관과 기념탑이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시절의 [[솔리다르노시치]] 투쟁은 [[안제이 바이다]]의 [[대리석 사나이]]와 [[철의 사나이]] 2부작에서 다뤄지고 있다. [[냉전]]이 끝난 현재, 그단스크는 참으로 오랜만에 긴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단스크의 구시가지는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폴란드의 주요한 경제, 공업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최근 그단스크에는 [[다국적기업]]들이 몰려오면서 그단스크에 지사를 세우고 있으며,[[https://news.joins.com/article/21789386|#]] 투자도 활발히 이루어져 그단스크는 폴란드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그런데 [[2019년]], [[1998년]]부터 시장직을 6선 유지 중이었던 파벨 아다모비츠(53) 시장이 괴한에게 암살을 당했다.[[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878463.html|#]] 일각에서 폴란드 현 여당인 우파 '[[법과 정의당]](PiS)'의 혐오 조장적 정치로 인한 사회적 혐오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이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