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규슈 (문단 편집) == 역사 == [[중국 대륙]] 및 [[한반도]]와 가깝기에 [[일본/역사|일본의 초기 역사에서 그 역할이 컸다]]. 혼슈 서남부와 함께 [[야마토|왜국]]이 세워질 즈음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지였다. 일본 역사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인 왜국의 위치에 대해 규슈와 서남부 혼슈 인근설과 혼슈 중부설이 대립할 정도로 일본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규슈는 고대 이후 그 역할이 서서히 축소되어 갔다. [[야마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 역사의 주 무대는 규슈에서 [[간사이]] 지방으로 넘어갔다. [[신라]]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이와이의 난]]이 실패하면서 재지호족의 세력도 크게 꺾였고[* [[야메시]]에 당시의 고분군이 있는데 딱 이 때부터 축조가 끊긴다.] 규슈는 [[다자이후]]를 통한 일본 서부의 거점 정도 역할만 남게 된다. 본토인들은 규슈인들을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는 [[가고시마]] 사람들을 사쓰마[[하야토]](薩摩隼人)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다분한 지역 차별다운 뉘앙스가 깔려 있는 단어다. 이것은 규슈 남부 지역이 비교적 일본에 늦게 복속된 것과도 관계가 있었는 데 뜻이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일본 안팎으로 확실한 역할을 하면서 지금의 하나된 일본 사회 시스템을 있게 한 완충지로서 다시 존재감을 강화하였다. 국제 세계와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난반 무역항([[나가사키]]현 등)을 이용해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의 무기를 비롯한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며 일본인들에게 침략의 시야를 본격으로 갖는 계기가 된 [[임진왜란]]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패전한 노량 해전에서 조선군에게 패해 도망치던 일본군 패잔병의 철수를 이끈 [[시마즈]] 가문은 규슈의 자고로 이어져 내려온, 유력한 세력이었다. 이렇듯 일본에서는 남단에 속하는 외딴 곳이면서도 국제 세계로의 길이 열린 지리상 특수성은 규슈와 인근 지역 사람들에게 국제사회와 변화의 시대 흐름을 포착하는 감각을 키워 주는 계기를 제공했다. 결국 규슈 지역 대다수와 인접한 일부 번이 근대국가로의 일본 내전이었던 [[보신 전쟁]]을 주도하여 승리하고 이어지는 [[메이지유신]]의 제도 혁신에도 규슈 출신의 많은 인재/ 세력이 초기부터 중심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와 가까워, 아시아와의 무역이 번성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일대는 오사카보다 한국의 [[부산]]이 가까우며 도쿄보다도 [[서울]]이 더욱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