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천상혼 (문단 편집) === [[영국]] === 유럽 국가면서도 역사 내내 귀천상혼 법이 존재하지 않은 사례. 애초에 [[영국]]은 귀족이 매우 적었고[* 다만 이는 [[앵글로색슨족]]이 막 잉글랜드를 세웠을 때의 영향보다는 다수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이 피지배층으로 전락하고 소수의 [[노르만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노르만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앵글로색슨계 왕조인 [[웨식스]] 왕조 시절에는 왕족을 포함한 지배층부터가 앵글로색슨족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도 상대적으로 많았겠지만([[앵글로색슨족]]에게 복속당한 [[켈트족]]도 언어, 문화적으로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된 상태.)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를 세운 뒤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침략에 저항했던 앵글로색슨 귀족들이 대거 피지배자로 전락해버리고 소수의 노르만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웨식스 왕조 때에 비해 귀족으로 군림하는 이들의 인구가 줄어들고 반대로 피지배층의 수가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장자 상속제가 적용되었기에 공작의 자손이라도 장자만 후임 공작이 될 수 있었다.[* 반면 독일계 국가들은 영지는 장남에게만 상속되더라도, 차남 이하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작위를 칭할 수 있었다.] 또한, 정식으로 작위를 잇기 전에는 엄밀히 말하면 평민으로 쳤기 때문이었다.[* 상술한 것처럼 귀천상혼 자체가 [[게르만족]]의 풍습에서 유래되었는데 비록 [[영국]]이 게르만계 국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섬나라]]인 만큼 [[앵글로색슨족]]이 유럽 본토의 게르만족과 다른 자신들만의 풍습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선주민인 [[켈트족]]으로부터 귀천상혼을 따지지 않는 문화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사실은 완전 평민이라기보단 법적으론 평민이 맞는데 의전상으론 한단계낮은 귀족 대우를 해주었다. 공작의 후계자는 후작, 백작의 후계자는 자작 이런식으로.] [[헨리 8세]]만 해도 6명의 [[왕비]] 중 단 둘[* [[아라곤의 캐서린]], [[클레페의 앤]]]만이 통치가문 출신이었다. 또 다른 예로 [[제임스 2세]]와 클라렌든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 원래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으며, [[찰스 2세]]를 지지하여 왕정 복고 이후 클라렌든 백작의 칭호를 받고 귀족이 되었다. 이랬기에 영국 언론들은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과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을 "영국 왕실의 2번째 평민과의 결혼"이라 보도했다.]의 딸 [[앤 하이드]][* 제임스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해서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2세]]와 [[앤 여왕|앤]]이 여왕으로 즉위한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과거 유럽에서 혼인동맹은 주요 외교수단 중 하나였기에, 영국도 차기 계승권자나 계승서열이 높은 왕족은 외국 왕족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1772년에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3세]]가 소위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이란 것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군주의 허락없이 이뤄진 왕위계승권자들의 결혼은 합법적이지 않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이 법이 사실상 귀천상혼을 강제하는 기준이 되었다.[* 참고로 이 법을 제정하게 된 이유는 조지 3세의 동생 [[헨리 프레더릭|컴벌랜드 공작 헨리]]가 형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 출신의 과부 [[앤 호튼]]과 결혼해버렸는데, 하필 이 결혼을 제지할만한 법률이 당시 영국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에 합법으로 결론이 나버리는 바람에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컴벌랜드 공작 헨리의 결혼은 이 법이 소급적용되지 않아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조지 3세의 또다른 동생 [[윌리엄 헨리|글로스터 공작 윌리엄]]도 몇년 전에 사생아 출신의 과부 [[마리아 월폴]]과 소위 근본 없는 비밀 결혼을 했지만, 왕실혼례법이 제정되기 전에 결혼했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었으며 두 사람의 자식들도 영국의 왕족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독일어권 기준으로는 명백한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하노버의 왕족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이 법률은 2015년까지 유지되다 폐지되었고, 2013년 제정되어 2015년부터 시행된 새로운 왕위 계승법에서는 결혼 시 승인이 필요한 왕족은 계승 서열 1 ~ 6위에 해당하는 인물에 한정하는 것으로 적용 범위가 축소되었다.] 다만 해당 법은 독일계 국가들의 경우와 달리 어찌 됐든 군주가 인정하는 결혼이라면 배우자의 신분이 어떻든간에 합법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후로도 다른 나라면 빼박 귀천상혼으로 규정되었을 결혼이 영국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일례로 [[조지 5세]]의 아내이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의 모후인 [[테크의 메리|메리 왕비]](테크의 메리, Mary of Teck)는 독일 뷔르템부르크 왕가의 귀천상혼으로 만들어진 테크(Teck) 공작 가문 출신이었다.[* 그나마 어머니인 [[메리 애들레이드|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가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고 영국의 공주이긴 했다. 메리 애들레이드는 영국의 공주인만큼 귀천상혼 가문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었지만, "Fat Mary(뚱뚱한 메리)"로 불릴 정도로 뚱뚱해서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 결국 사촌 빅토리아 여왕이 적극적으로 신랑감을 찾아주어 테크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였으면 왕족과 결혼하지 못했겠지만 귀천상혼의 개념이 그다지 없었던 영국이었던지라, 조지 5세와의 결혼은 동등결혼으로 인정되었고 메리가 낳은 자식들도 모두 적자로 인정받았다. 사실 당시에도 메리의 친정에 대해 귀천상혼 출신이라는 지적이 많았으나, 시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대대적으로 밀어준 결혼이라서 아무도 크게 반발하지 못했다. 원래 [[조지 5세]]의 형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장손인 [[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앨버트 왕자]]와 약혼했으나, 앨버트 왕자가 독감으로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형사취수]](?)로 조지 5세와 결혼했다. 메리 왕비의 며느리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도 백작 가문 출신으로 조지 6세와의 결혼은 마찬가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메리 왕비를 비롯한 왕실에서도 '이런 처자라면 버티(조지 6세의 애칭)와 충분히 결혼시킬 만 하다'라며 찬성해서 결혼이 이뤄진 것. 게다가 영국의 [[백작]]은 그 근본이 부족의 족장(Earl)이기 때문에 [[프린스]]와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해서 왕실과의 결혼과 트러블이 생길 일이 많지 않았다. [[조지 6세]]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한 것도 귀천상혼이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왕실에서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한 이유는 그녀가 미국인이기 때문이여서가 아니라, 이미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이혼녀인데다 재혼한 남편을 두고 대놓고 에드워드 8세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지저분한 사생활을 영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왕이 수장으로 있는 [[성공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찰스 3세]]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취급받을 뻔했으나, 역시 귀천상혼 배제의 개념이 없는 영국인지라 이와 상관없다는 판결을 받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6&aid=0000166844|#]]. 영국의 전 왕조이자 하노버 왕국의 전 왕조였던 [[하노버 왕조]]도 20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독일식 귀천상혼제를 버리고 가문의 수장이 인정하는 결혼이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주는 영국식(?)으로 바뀌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