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천상혼 (문단 편집) == 영향 == * 귀천상혼을 배제하고 [[동질혼]]을 추구하던 특성상 결혼을 할 수 있는 집안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유럽 왕가들은 [[근친혼]]이 심해졌다. 가끔 한미한 가문이 높은 계급의 귀족이 되어서 새로운 혈통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도 세대가 흐르면 결국 근친혼이 생겨났다. 독일은 오랫동안 많은 독립된 소국들로 분립되어 있었던 터라 비교적 나은 편이다. 그렇다보니 유럽 여러 왕실에서 독일 왕공실 출신 배우자와 결혼한 경우가 많다.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이 러시아 황실로 유전된 것도 이런 외국 왕가들간 혼맥의 결과물이다.[*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내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 게다가 그 혈우병으로 인해 [[러시아 혁명]]까지 일어났으니 엄청난 [[나비 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를 기준으로 볼 때, 친외가 따지지 않고 [[노르웨이]]의 [[하랄 5세]]는 6촌이자 8촌,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벨기에]]의 [[알베르 2세(벨기에)|알베르 2세]],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과는 8촌이다. 이보다 먼 관계의 군주들은 생략. 여담으로 엘리자베스 2세와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은 서로 8촌, 7촌관계이다.[* 필립 공 기준으로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모계로는 8촌, 부계로는 7촌관계이다.] * 유럽의 여러 왕가들이 혼맥으로 연결되어 멀고 가까운 친척 관계인 경우가 많다보니 왕가의 대가 끊기면 외국 친척 왕가의 사람을 왕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아예 생판 다른 외국의 왕가에서 모셔오기도 하고, 상관없는 다른 나라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례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 나라별로 가문별로 귀천상혼 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적용방식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가령 직계왕족이 아닌 다소 먼 방계 왕족 같은 경우에는 군주의 사생아나 귀천상혼한 왕족의 자녀와 결혼하더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귀천상혼한 왕족의 딸이 먼 방계 왕족과 결혼했는데 동등결혼으로 인정받고, 나중에 그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어서 그 자손이 왕이 되는 식의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실제 사례로 [[카를로 알베르토]]가 있는데, 카를로 알베르토의 어머니가 귀천상혼한 왕족([[아우구스트 3세]]의 3남 카를)의 딸이다. 비슷하게 귀천상혼으로 창시된 가문 출신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했고, 앨리스의 여동생인 [[루이즈 마운트배튼]] 역시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결혼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으며, 이 둘의 사촌이자 같은 가문 출신인 [[빅토리아 유지니|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는 [[알폰소 13세]]와 결혼해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당연히 바텐베르크 자매들의 결혼도 전부 동등결혼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유럽 왕실 족보를 윗 세대로 올라가서 보면 후손은 군주인데 조상 중에 시골의 기사나 심지어 평민이 있는 경우도 흔하다. * [[칼 14세 요한]]이 즉위한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경우는 벼락출세한 미천한 가문이라는 악평을 면하기 위해 귀천상혼 배제 원칙과 [[살리카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다만 이는 베르나도테 왕가 성립 초기에 기존 왕실들이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벼락출세한 베르나도테 왕가와 통혼하는 걸 기피하는 바람에 반강제적인 면도 있었다. 칼 14세 본인부터가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인 [[데지레 클라리]](나폴레옹의 前 약혼녀로 유명하다)와 즉위하기도 전에 결혼했고, 그의 아들인 [[오스카르 1세]]도 [[외젠 드 보아르네]](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의 딸이자 똑같이 벼락출세한 가문 출신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와 결혼했다.[* 다만 조제핀의 어머니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아우구스테]]는 바이에른의 공주였으며 조제핀의 첫쨰 남동생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오귀스트]]는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고, 둘째 남동생 막시밀리앵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819)|러시아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했으며 여동생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아멜리]]는 [[페드루 1세(브라질)|페드루 1세]]와 결혼해 브라질의 황후가 되었다.]] 그 결과 '''왕위를 계승한 후손이 얼마 남지 않아 버리는 바람에'''[* 남계 후손은 많았는데 상당수가 귀천상혼을 해버렸다.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가 태어날 때 쯤에는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리고 이 후계자 문제는 지구 반대편 [[히사히토|일본에서도 겪고 있다]]. 물론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귀천상혼 배제를 폐지했지만 아직 [[살리카법|여계 승계 금지]]가 멀쩡히 살아있었다.] 결국 귀천상혼 배제와 살리카법을 둘 다 폐지해 버리고 절대적 장자 상속법(남녀 구분 없이 먼저 태어난 왕자나 공주에게 계승권을 주는 계승 법칙)으로 계승 규칙을 바꾸었다. * 최근의 귀천상혼 사례로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3세]]의 두번째 아내인 레티 공비 릴리안 바엘이 있다. 레오폴드 3세와 릴리안 바엘은 2차 대전 중인 1941년에 [[혼전임신|속도위반]]으로 결혼했는데 릴리안 바엘은 미국 출신이였기 때문에, 왕비 칭호를 받지 못했고 그녀가 레오폴드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3명의 자식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릴리안 바엘의 아이들은 나중에 여러가지 트러블[* 릴리안 바엘은 어느 정도 장성한 의붓자식들[* 레오폴드 3세의 장녀 [[조제핀샤를로트]]와는 11살 차이라 거의 큰언니뻘이였다.]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정작 본인의 친자식한테 다소 소홀히 대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계모]] 항목 참조.]을 일으키면서 벨기에 왕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어찌 보면 릴리안 바엘의 자식들에게 계승권이 없었던 게 다행일지도. 아이러니하게도 릴리안 바엘을 레오폴드 3세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엘리자베트]]'''였다. 사실 릴리안 바엘의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 일으킨 사고가 문제였지, 레오폴드 3세와 릴리안의 재혼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레오폴드 3세는 릴리안 바엘을 만나기 2년 전에 이미 [[스웨덴의 아스트리드|아스트리드 왕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홀아비]]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레오폴드가 재혼한다고 할 때 아스트리드 왕비의 부모이자 레오폴드 3세의 전 장인장모인, 스웨덴의 칼 왕자와 덴마크의 잉에보르 공주도 [[내로남불|툭하면 이혼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손주들도 환영하는 '''사별 후''' 재혼이 무슨 문제가 되냐고]] 벨기에 국민들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벨기에의 이혼율은 옛날부터 유명했다.] 여담으로 릴리안은 죽기전에 말년에 여생을 보낸 [[워털루]] 인근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왕실의 체면 때문에 남편과 남편의 전처와 같이 합장되었다. * 귀천상혼으로 인해 왕가에서 파생되어 생겨난 귀족 가문도 상당히 있다. 예를 들면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호엔베르크 공가(1900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자손들.], 헤센 대공가([[헤센 대공국]])로 부터 바텐베르크 공가(1858년)[* 훗날 1차 대전 시기 마운트배튼 가문으로 변경. [[필립 공]]의 외가이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가문.], [[뷔르템베르크]] 왕가로부터 테크 공가(1871년. 1981년 단절)[* [[조지 5세]]의 [[왕비]]인 [[테크의 메리]]의 친정 가문], 우라흐 공가(1867년)가 파생되었다. * [[스페인]]의 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에도 귀천상혼이 영향을 끼쳤다. 원래 계승자인 후안 카를로스의 백부 아스투리아스 공 알폰소가 귀천상혼으로 결혼하면서[* 다만 알폰소의 귀천상혼은 스페인 왕조 붕괴 이전에 이루어진데다가 슬하에 자식도 없었고, [[혈우병]] 환자였던 탓에 오래 살아 자식을 남길 가능성도 낮아서 결과는 어차피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계승권을 포기했었다. * [[브라질 제국|브라질]] 황가의 경우 귀천상혼의 적용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두 계통으로 분열되었다. 마지막 황제 [[페드루 2세(브라질)|페드루 2세]]의 장녀인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이자베우]]의 아들들 중 본래 장남 페드루 지 아우칸타라가 후계자였다가 페드루가 1908년에 체코인 귀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 논란이 생기자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후계자가 차남 루이스로 교체되었는데,[* 루이스는 어머니보다 1년 일찍 사망하여 명목상의 황위는 루이스의 아들 페드루 엔히크가 이었다.] 1940년에 페드루가 사망하자 그 장남 페드루 가스탕이 구 브라질 제국 헌법에 황위 계승권자가 왕족과 결혼할 것을 규정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부친의 계승권 포기는 무효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황가의 수장으로 선언한 것이다. * 귀천상혼 논쟁으로 인해서 본가와 연을 끊은 경우도 있는데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르마 가문[* [[부르봉 왕조]] 항목 참고]이 대표적이다. 룩셈부르크의 전 대공 [[장(룩셈부르크)|장]]은 아버지가 부르봉-파르마의 공자 펠릭스였기 때문에 본가는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일원이였다.[* 룩셈부르크 공위는 어머니인 [[샤를로트(룩셈부르크)|샤를로트 여대공]]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룩셈부르크 공가는 어찌되었건 현재까지도 통치 가문이기 때문에, 공실 일원들도 상대적으로 귀천상혼 논쟁에서 자유로웠다. 그로 인해 장 대공의 아들들은 모두 평민과 결혼했고 장 대공 본인도 그 결혼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지만, 정작 통치지역을 잃어버린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수장 카를로스 우고가 이를 귀천상혼이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발생되었다. 이에 장 대공은 본가 부르봉-파르마 가문과 결별하고, 자신을 [[나사우 가문|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기존 룩셈부르크 대공가이자 자신의 어머니의 가문이었다.]이라면서 성을 갈아버렸다. * 귀천상혼은 국가를 왕가의 재산으로 보던 시절의 유산이기 때문에 현대 왕실에게 있어서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국민들의 지지가 지속되는데다, 덕분에 자신들의 가문이 계속 군주직을 유지하는게 가능하며 평민과의 결혼이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를 모아줄 이벤트가 되기도 한다. * 20세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폐지된 왕실의 왕자들은 같은 왕족 출신 배우자를 찾기 힘들어져 자연스레 귀천상혼이 폐지된 가문들이 많아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조차도 상속자를 재벌과 결혼시키기 위해 귀천상혼법을 없앴고, 독일 전 황가인 호엔촐레른 가문 정도만 아직까지 귀천상혼을 지키고 있다. 물론 호엔촐레른 가문 역시 귀천상혼을 다소 완화해서 일반 [[귀족]] 출신의 여성이랑 결혼해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벌어진 이유에 이 귀천상혼이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할 당시 본래 계승권은 그의 형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우선 순위가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폴란드 귀족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에 걸려 그의 자녀들은 황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콘스탄틴은 황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인 니콜라이에게 계승권을 양보하였다. 그런데 청년 귀족 장교들이 콘스탄틴의 황위 옹립을 명분으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분류:결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