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고리 (문단 편집) == 한국사 == || [[파일:신석기시대 귀고리 - 부산 동래구 복천박물관.jpg]] || || [[파일:부산 출토 신석기시대 귀고리.jpg|height=400]] || || 부산 출토 [[석기시대#s-2.3|신석기시대]] 귀고리 || || [[파일:25_i2.jpg|height=400]] || || [[파일:1_i19_1.jpg|height=400]] || || [[파일:25_i3.jpg|height=450]] || || [[파일:25_i4.jpg|height=250]] || || [[부여]] 귀고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68026&cid=42954&categoryId=42954|부여의 황금문화]] || || [[파일:고구려, 신라, 백제 귀걸이.jpg]] || || [[파일:565ESyQUGcQCIY0Omi8seK.jpg]] || || [[파일:삼국시대 귀고리.jpg|height=300]] ||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조선]] 귀고리 [[https://theqoo.net/square/976032763|다양한 양식의 삼국시대 귀고리들]] || [youtube(kAzAE7oKXjQ)] [[대한민국]]에서는 원래 [[석기시대#s-2.3|신석기 시대]]부터 남녀 모두 일반적으로 착용하던 장신구였다. 특히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삼국시대]] 귀고리들 중 몇몇은 사이즈가 상당히 [[크고 아름다운|크고 아름다워]] '귀에 구멍을 얼마나 크게 뚫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대표적으로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금귀걸이]]가 있다. 특히 [[신라]]시대 태환이식은 귀에 걸기엔 너무 커 보여서 한때는 끈을 걸고 걸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분황사 모전탑에 공양된 은제 귀마개나 황룡사지 출토 은제 귀마개를 고려하면[* 귀에 뚫은 구멍이 다시 붙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원판 모양 도구이다.] 태환이식은 착장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만 이런 태환이식들은 속이 적당히 비어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볍다고 한다. [[선덕여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황사 출토 은제 귀마개는 그 아름다움도 놀랍지만, 선덕여왕이 직접 이런 귀마개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귀고리들은 금관, 발찌, 팔찌, 허리띠 등에 매달아 드리개 장식처럼 응용해서 쓰기도 했다. 특히 금관이나 허리띠에 다는 수식의 경우 귀고리로 쓰일 때 부터 수식 장식이 화려하고 더 긴 경향이 있다. [[파일:귀걸이 궁예.jpg]] [[파일:c9a60b1c188c64b77d62cb30da2c3fd635abbce2.jpg]] [[파일:4D8LxrQB3iwGeOICcoEwWI.jpg]] 그런고로 조선시대 중기 이전을 다룬 [[사극]]에서 [[고증]]을 제대로 맞추려면,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특히 자주 나오는 고위 귀족이나 왕족일 수록 [[귀고리]], [[팔찌]], [[목걸이]], [[반지]] 등 황금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도록 해야 한다. 드라마 [[화랑(드라마)|화랑]]에서도 민호, 뷔 등이 긴 드롭 이어링을 착용했다. 아이돌이라 원래 귀를 뚫은 것. 드라마 중간중간 장면에서 귀걸이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도 드라마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에서는 귓바퀴에 거는 귀걸이를 등장시켜 나름대로 고증을 살렸다. 귀를 뚫어야 하는 부담도 없는 데다가 귀걸이가 크고 무겁더라도 착용이 가능하다. 이 드라마에서는 [[정웅인]]이 이런 귀걸이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고증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있지만 [[https://blog.naver.com/hs72hs72/220355075748|장신구 소품 고증은 은근히 꼼꼼했던 드라마였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귀고리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흔히 달고 다니던 액세사리였다. 이 때는 여성 한정으로 '''귀에 걸치는''', 그것도 [[금]]도 [[옥]]도 아닌 노리개 같은 술을 달아놓은 귀고리가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의 목을 잘라 전공을 부풀리려던 장수들이 '''이 수급의 귀에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므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속임수를 들켰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10004_006|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4일 신유 여섯 번째기사]]를 참조.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정글고]]에도 이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원래 해당 내용의 웹툰을 볼 수 있도록 링크가 걸려 있었으나 아쉽게도 정글고가 유료화 된 이후로 볼 수 없다.] 또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한 [[역관]]이 [[중국]]에서 겪은 실화 중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대단히 콧대가 높아 조선인을 상대하지 않는 기생'에게 중국인이라 속이고 접근했는데, 그가 워낙 중국어를 중국인처럼 잘해 처음에는 속았던 그 기생이 그의 귀를 보고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니 당신은 조선인'''이라고 알아차렸고, 그 역관은 부랴부랴 "내가 외아들이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여장을 시키면서 귀고리를 달았던 자국이다"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부터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선조 시기 때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적인 문제로 젊은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신체발부 수지부모,미개한 풍속이어서 금했다기보다는 귀고리 때문에 금과 은의 수입이 늘어나 국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509028_002|조선왕조실록 선조 5년 9월 28일 기사]]를 참고. [[명나라]]가 망하고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면서 유교와 검소함을 강조했던 조선의 이념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사치의 상징인 귀금속 장신구 문화를 위축시키고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내려 오던 만큼의 화려함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사실 조선 자체가 중국식 제도를 대거 받아들이며 과거를 청산하고 재탄생했다는 느낌으로 이전 왕조들과 다른 점이 많다. 사실 이런 귀고리 박멸은 조선 초기 때부터 조짐이 있었는데, 세종 시절 명나라에서 '원나라에 금 바친 것처럼 우리한테도 금 바쳐라'라고 요약할 수 있는 요구를 줄기차게 해온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금 상납을 피하기 위해 '조선에는 금이 많지 않다'는 핑계를 대려고 머리를 굴려야 했는데, 막상 그렇게 핑계를 대자니 조선 여기저기에서 금을 유통하고 있는 곳이 너무 많았고, 결국 세종은 금 금지령을 내려 조선에서 금을 감추고 명나라에 핑계를 댔다. 덕분에 금 상납은 면제받았지만 명나라에의 금 상납이 무위로 돌아간 후 금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는데, 중기로 이르러서 선조 때 그것이 유교적인 사상을 이유로 터진 것이다. 그래서 귀를 뚫는 귀'고리'도 대부분이 귓등에 걸치는 귀'걸이' 방식으로 바뀌게 되고, 교과서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화려하고 현대 기준으로도 세밀하기 그지없는 형태의 금속 귀고리들도 대부분 끈 등으로 만들어 작은 은구슬이나 술장식을 달아놓은 노리개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몽골계의 풍습을 금지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런 장신구 문화는 몽골같은 북방계 보다는 오히려 [[인도차이나 반도]], [[대만]],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남방계 문화와 가깝다. 실제로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는 직경 2~9cm, 심지어 20cm로 달하는 귀마개[* 귀에 뚫은 구멍을 유지시키는 마개. 원판처럼 생겼다.]나 귀고리가 존재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에서 귀고리를 거는 풍습은 [[석기시대#s-2.3|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인데, 신석기 대표 유적인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흙으로 빚어 구운 직경 9cm짜리 귀마개들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시대]] [[아라가야]] 고분군인 함안 도항리 고분군, [[신라]] 고분군인 경산 임당 고분군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러나 꼭 남방계만의 문화라고 하기에도 뭐한게 위 역사스페셜 영상을 보면 남자들까지 귀고리를 하는 문화는 [[흉노족]], [[선비족]], [[예맥족]]([[한민족]]) 등 북방민족의 풍습이었다. 조선시대 때 통역관을 지낸 안정란이라는 사람이 중국을 갔을 때 능숙한 중국어와 함께 중국식 옷차림을 하고 한족만 출입 가능한 사창가를 갔다가 귀에 뚫은 귀고리 구멍 때문에 들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는 여성들이 [[만주족]]의 풍습대로 귀걸이를 한쪽 귀에 3개씩 해서 총 6개의 귀걸이를 달기도 했는데, 황실에서 귀고리의 부품으로 사용하는 진주에는 신분에 따라 등급이 있었으며[* <皇朝礼器图式(황조예기도식)>: 황태후, 황후의 귀걸이는 1등 동주 2개, 황귀비, 귀비, 황태자비의 귀걸이는 2등 동주 2개, 비의 귀걸이는 3등 동주 2개, 빈의 귀걸이는 4등 동주 2개] 사극 드라마 [[연희공략]] 등에서 만주족식 삼중 귀걸이가 잘 묘사된다.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남자들이 귀걸이를 했다. 그래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귀걸이가 보인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도 당시 고증을 살려 남자 배우들이 귀걸이를 하고 출연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험난한 항해를 떠나는 선원들이 일종의 부적으로 귀걸이를 착용하기도 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Earring#Religious|링크]] [[필리핀]], [[캄보디아]],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들의 귀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무조건 뚫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이로 인해 [[미국]]으로 넘어온 [[히스패닉]]들이 아동의 신체의 자유와 관련한 문제에 놓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일본]]은 귀를 뚫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는지 오늘날까지도 귀를 뚫지 않은 여성의 수가 한국보다 훨씬 많고 [[일본 제국]] 시절에는 [[아이누]] 남녀들의 입술 문신과 함께 귀 뚫기도 금지한 선례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