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희로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권희로의 가석방을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승려 박삼중과 재일동포 사업가 조만길 등이 '재일 한국인 김희로 씨 석방 후원회'를 만들어 노력해 왔다.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단행본 『분노는 폭포처럼』으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고 기자 출신 작가인 [[혼다 야스히루]](本田靖春)의 『사전(私戰, 시센)[* 사전(私戰)이란 개인이 사사로이 벌이는 전쟁을 의미한다. 한국어 사전에는 없는 단어이지만 한국 형법에도 “외국에 대하여 私戰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이 있다.]』으로 나왔었다. 1990년대 초에는 이 『사전』을 원작으로 [[김영빈]] 감독·유인촌 주연 영화 <[[김의 전쟁]]>이 제작되기도 했다. [* 정확하게는 일본에서 먼저 극화물이 나왔다.] 1999년 9월 7일, 31년 만에 석방되었고,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장기수는 법으로 국외 추방토록 규정된 일본 법규에 따라 승려 박삼중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뒤 친아버지의 성을 따라 권희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귀화했다. 귀국 후에는 [[중앙일보]]로부터 후원을 받게 된다. 권희로의 후견인이었던 승려 박삼중과 오랜 인연이 있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김준범의 힘을 빌려 독점 계약을 성사한 것. 1999년 9월 10일, 권희로가 중앙일보를 방문해 당시 사장 홍석현을 만난 것도 이 덕분이었다. 당시 한국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이런 극진한 대접을 비판했는데 당시 시민들로부터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앙일보가 권희로를 극진히 대접한 것은 사실이었는데, 평생 구독권을 선물하고 호암 갤러리를 구경시켜 줬으며, 삼성서울병원에서 2박 3일간 정밀 건강 진단을 받도록 조처했다. 이후 총 19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권희로의 수기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가 연재된다. 연재가 끝난 후 중앙일보는 자회사 중앙M&B(현 알에이치코리아)를 통해 수기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한다. 중앙일보로서는 나름대로 다 계산이 있는 투자였던 셈이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101100011|월간조선 2001년 1월호]]에 의하면, 1981년에는 돈(頓)모(52) 여인과 옥중 결혼식을 가졌다.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12310&pt=nv|이 돈 모씨는 1979년 출옥한 후, 권희로에게 온 후원금 등을 포함해 3억 원을 몰래 빼돌린 적이 있었는데, 권희로가 이 사실을 알고서도 용서해 주었다.]] 이후 권희로가 귀국한 후 돈 모씨와 2000년 2월부터 4월까지 부부로 함께 살았으나, 귀국하고 2개월 후 돈 모씨는 권희로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지 못하겠다면서 권희로의 돈을 가지고 달아났으며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져간 권희로의 돈은 "정신적 피해의 보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42202|2001년 9월에 체포됐다.]] 애초부터 이 여성은 내연 관계에 있던 일본인의 본처를 살해한 죄로 수감되어 권희로와 감옥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으며, 두 번이나 권희로의 돈을 훔쳐 달아나는 등 질이 좋지 못한 인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