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유동 (문단 편집) == 생애 == 1890년 1월 2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권영복(權永復)과 어머니 [[벽진 이씨]] 이옥윤(李沃允)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영해면 성내리에서 처음 전개된 시위에 참가했던 시위군중들이 병곡면 병곡리로 시위 장소를 옮기자, 그는 [[남조홍]]과 함께 앞선 시위에 참여했던 2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그 날 오후 2시경 영해면 장터를 출발하여 병곡 경찰관 주재소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영해면 시위에 미처 참가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동참하면서 그 수가 4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군중들이 병곡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운동을 벌이자,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였다. 그러자 권유동을 비롯한 시위군중들이 돌, 곤봉, 낫 등을 들고 주재소에 침입하여 기물과 서류 등을 파기하고 벽까지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에 있던 경찰 3명이 총을 휴대하고 백석리로 도주했고, 시위대들은 병곡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사무소까지 파괴했다. 달아났던 일본 경찰 3명은 평해면 헌병분견소로부터 지원 받은 3명의 헌병들과 함께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시위대를 지휘하던 [[정규하]]는 일본 경찰들을 향해 "조선인 순사들을 전부 데리고 오라"고 호통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도리어 발포하려 했고, 결국 정규하는 시위군중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산을 종용하고 오후 7시 30분 무렵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는 처분을 받아[[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30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517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3개월 20여 일 간 구금되었다가, 그 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0&evntId=0034987885&evntdowngbn=Y&indpnId=000001916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출옥 후에는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7년 9월 12일 별세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8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 권씨 부정공파]][[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1890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