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영길 (문단 편집) == 생애 == 1941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아버지 권우현(權宇鉉, 1915. 11. 13 ~ 1953. 1. 19)[* 안동권씨대동세보 15권 348쪽에는 權'''{{{+1 禹}}}'''鉉으로 등재되어 있다.]과 어머니 [[진주 하씨]] 하영애(河永愛, 1921. 3. 12 ~ 2014. 4. 28)[* 하인진(河仁鎭)의 딸이다.] 사이의 1남 2녀 중 [[고명아들|첫째]]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아버지를 따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1&aid=0000066575|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권우현은 [[빨치산]] 활동했으며, [[6.25 전쟁|한국전쟁]]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부산광역시]]로 이주해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였다. [[남부민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 [[누에나방|누에치기]](양잠업)와 [[비단|비단실]]을 연구하는 학과였다. 현재는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소재공학. [[여담]]으로, [[가수]] 겸 [[배우]] [[김창완]]이 그의 대학 직속 [[후배]]이다.]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대한일보, [[서울신문]] [[기자]]로 재직하였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주재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1988년 '서울신문 노동조합'을 결성해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노조를 만들긴 했는데, 누가 위원장을 맡을 것인가로 노조원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당시 마흔 일곱살로 노조원 중에서 최연장자였던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같은 해에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 위원장, 1990년 5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약칭 업종회의. 언론·금융·교사·병원·공공기관 등 사무직/전문연구직 노조들의 연합체.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으로 출발하였다.] '''초대''' 위원장, 19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생산직 노조 연합체였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과 사무직 노조연합체였던 '업종회의' 그리고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약칭 현총련) 3개 조직의 대통합으로 출범하였다. 만장일치로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3개 조직 출신을 골고루 안배해서 초대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96년 12월 24일 새벽에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기습적으로 [[날치기#s-2]] 처리하자, 이에 항의하는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을 이끌면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후 진보 정당의 뒷받침이 없는 노동 운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직접 진보 정당 건설에 뛰어들었다. 1997년 9월 7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결집한 임시대책기구 [[국민승리21]]의 '''초대''' 대표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9월 29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 선거에선 득표율 1.2% 고작 30만 6,000표 득표에 그치며 목표했던 100만표 이상의 득표에 실패했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3317|당시 기사]] 대선 참패로 진보 진영과 노동 운동 상당수가 진보 정당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여주는 중에도[* 심지어 당시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으로 민주노총의 숨은 실세라는 이야기를 듣던 [[심상정]]도 진보정당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였다.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은 현장에서 싸워야한다는 입장으로, 심지어 지금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탄압당하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무슨 [[금뱃지]] 타령이냐면서 비아냥대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에선 오랜 기간 형성된 냉전반공의식 때문에 실현불가능이라고 보는 진보인사들도 상당했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가까운 민주당 계열에 대한 '비판적지지' 노선을 고수했다.], 국민승리21 대표로 진보정당 건설운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대표를 맡았다. 같은 해 4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주영(정치인)|이주영]] 후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의 [[해양수산부]] 장관 맞다]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주영 후보도 불과 44.1%를 득표한지라 37.8%를 득표한 권 후보로서는 아까운 석패였다. 13%를 득표한 여당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거나 단일화를 했다면 이탈표가 좀 있더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박빙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민주노동당 대표로 활동하면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여론조사에서 3%이상을 넘으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 결정에 의거해서[* 당시 국회에 의석이 없던 민주노동당은 TV토론회 참여를 위해서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한 끝에 여론조사에서 3%가 넘는 후보는 TV토론회에 참여가능하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최초로 대선후보 TV토론회에 참여하여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오랜 기간의 꾸준한 활동과 대선TV토론 참여로 민주노동과 권영길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하여 선거운동기간 도중 한때는 지지율 10%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표 전날 [[정몽준]]의 일방적인 단일화 철회 선언으로 상당수 지지표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지지로 넘어가면서[*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따라서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표 이상으로 추정한다.], 최종적으로는 득표율 3.9% 약 96만표를 득표하였다.[* 이 기록은 15년 뒤에서야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에 의해 깨진다.] 그러나 이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 후보가 216만표를 득표한 이후 진보정당이 거둔 최고의 성과였다. 이때부터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은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한명 없는 원외정당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인식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역시 [[창원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한나라당 [[이주영(정치인)|이주영]] 후보에게 설욕하였다. 2005년 11월 [[민주노동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7352.html|기사]].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선에서 [[심상정]], [[노회찬]] 후보를 꺾고[* 1차 경선에서 과반에 근소하게 미달, 결선투표에서 근소한 차이(52.7% 대 47.3%)로 심상정 후보를 이겼다. 권 후보는 상대 두 후보가 PD 조직의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내세울 후보가 없는 NL 조직의 지지를 받았고, "[[고려연방제|코리아 연방공화국]]"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사실 본인도 확고한 NL 성향은 아니라서 "진보정당의 대표 얼굴로서 대선을 책임진다"는 목표를 위해 일시 연대한 것이었고, 이것이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은 인지하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때의 갈등이 대선 패배 직후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사태로 이어진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는 후문.] 민주노동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였으나 5위로 낙선하였다. 다자후보 구도 속에 오히려 5년 전보다 다소 적은 득표를 받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하지 않았다. 창원시 을에서는 [[강기윤]] 후보가 [[진보신당]]과 단일화에 실패한 통합진보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12년 9월 11일 [[천영세]]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으며 [[http://www.redian.org/archive/41174|기사]] 이후 [[2012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공민배]]와 단일화를 하여 무소속 야권단일 후보로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불과 37.1%의 득표로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득표율 자체는 2년 뒤 [[6회 지선]]의 김경수 후보보다 많다. (통합진보당 별도 출마로 합산시엔 40%로 조금 적은 수준.) 홍준표의 무혈입성을 막기 위해 희생한 출마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후 2013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이후로는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를 통해 무상의료, 무상교육 운동을 하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 선대위 고문으로 역임하는 등 [[정의당]]의 평당원으로서는 계속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노회찬]] 경남 창원성산 후보 사무소 개소식 때 이전의 익숙했던 모습과 달리 잠시 희귀병 투병생활로 머리가 다 세었고 얼굴이 부은 야윈 모습으로 [[역변]]했기에 [[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4580693|#]]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꼈고, 세간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었다. 그래도 개표방송 땐 어느 정도 병세가 완화되었는지 이전의 모습을 그럭저럭 되찾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https://i.ytimg.com/vi/-yYmvFc205M/maxresdefault.jpg|#]] 2016년 7월에는 [[김종인]] 전 [[더민주]] 비대위원장과 비밀회견을 하여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의논을 나누었으며,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707085500001&mobile|기사]].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집회에도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였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정의당 선대위 고문단으로 참여하였고 옛 지역구인 창원[* 당시 해당 지역구(창원 성산)는 같은 당 소속인 [[노회찬]] 의원이 당선되어 활동하였다.]에서 [[심상정]] 후보 지지연설을 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orknworld.kctu.org/246022_20680_1949.jpg]] 또한 [[민주노총]] 지도위원 및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에 추진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다. [[http://www.vop.co.kr/A00001166158.html|기사]] 2018년 7월 당시 [[독일]]에 장기체류하던 중 [[노회찬]] 의원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으며 이후 [[2019년]]에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정의당]] [[여영국]]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창원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국회의원 당선을 도와준 [[손석형]] 후보를 버렸다며 [[민중당(2017년)|민중당]]에서 비난을 하기도 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23971|기사]].)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지지선언, 지지유세를 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23&oid=426&aid=0000009194|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1048|기사]]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411_0000991104&cID=10301&pID=10300|기사]] 그동안의 정의당 후보 지지에 비하면 의외로, [[2022년]] [[20대 대선]]에서는 [[진보당(2020년)|진보당]]의 [[김재연]]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2달 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과 연계된 진보4당[* 정의당, 진보당, 노동당, 녹색당. [[기본소득당]] 제외.] 단일화를 적극 지지하며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한 [[권수정]] 후보를 지지하였다. 여전히 범진보정당의 웃어른으로 탈정파, 초계파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라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사단법인 평화철도, 나아지는 살림살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86546&fbclid=IwAR1bLZuuDMrQNzcl9Dwtcv5L1tPBi50ytYNTAVs6PcDJOWItf8QjJ1qYJeI|2022년 2월 인터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