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궈쑹링 (문단 편집) === [[장쭤린]] 휘하에 들어가다 === 죽음을 면한 궈쑹링은 군사학 습득의 중요함을 느껴 [[1912년]] 북경장교연구소에 시험을 쳐서 입학했고 그곳에서 학생회장이 되었다. [[1913년]] 북경장교연구소를 졸업한 궈쑹링은 봉천으로 돌아와 봉천 도독 장석란의 참모가 되어 잠시 근무하였고 당해에 베이징 중국육군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매우 열심히 공부하였다. [[1916년]] 육군대학을 졸업한 궈쑹링은 베이징 강무학당의 초빙교관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돤치루이]]의 독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궈쑹링은 1917년 단신으로 [[광저우]]로 떠나 [[광저우]] 군정부의 [[쑨원]]에게 합류하려 했다. 마침 광동성장이었던 주칭란의 소개로 광동군 경위영 영장이 되었다. 궈쑹링은 [[쑨원]]을 만나 군벌 타도를 주장했다. >"진정한 공화국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군인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군인들은 매번 군벌을 이용해 특수 세력을 조성하여 실질적으로 공화 정치의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고로 군인 자신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쑨원]]은 궈쑹링의 말을 크게 칭찬했고 궈쑹링은 [[삼민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8년]] 5월, [[쑨원]]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던 남방군벌들에게 실망한 [[쑨원]]은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궈쑹링은 광동에서 운남강무당 소관 분교 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궈쑹링은 광동과 광서에서 동지들을 모아 동삼성 개혁을 의논했다. 궈쑹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동삼성을 근본부터 뜯어 고치려면 나쁜 군벌들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군벌을 쓰러뜨리려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봉천으로 돌아가 봉천 군벌의 소굴에 일단 들어갔다가 병권을 잡고 세력을 기른 후에 근본적 개조를 도모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궈쑹링은 즉각 짐을 꾸려 봉천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를 따라서 봉천군벌에 합류한 사람이 바로 [[성스차이]]다.] 독군서 참모장이며 육군대학 동기인 펑화(奉華, 봉화)의 추천으로 독군서 참모가 되었고 곧 장쭤린이 1919년에 세운 동삼성육군강무당 교관이 되어 중령 대우를 받았다. 어느날 강무당에서 강의하던 궈쑹링과 장쭤린이 마주쳤는데 장쭤린은 "자네는 혁명당원이었는데 오늘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가?"라고 묻자 궈쑹링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과거를 묻지 않고 그가 계속 일하도록 허용했다. 궈쑹링은 전술에 조예가 깊어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았고 스스로 정문 감독을 맡아 지각하는 학생들을 엄히 다스렸으며 학생 대장, 학생 구대장들에게도 관여하였다. 이때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강무당의 학생이었다. 장쉐량은 궈쑹링을 '존경하는 스승' 또는 '가까운 친구'로 여겼다. [[1920년]] 육군강무당을 1기생으로 졸업한 장쉐량은 동삼성 순열사 경호대 여단장에 임명되었고 궈쑹링을 [[장쭤린|아버지]]에게 추천하여 참모장 겸 2연대 연대장으로 임명하게 함으로 궈쑹링의 본격적인 지휘관 생활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