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궈쑹링 (문단 편집) === 군문에 들다 === 그러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만주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상무정신의 풍조가 형성되었는데 1905년, 성경장군이 되어 만주의 통치를 맡은 조이손이 봉천육군소학당을 세우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방진을 총판으로 삼았다. 이는 육군장교의 기초 소양을 훈련시키는 3년제 학교로, 국어, 수신, 역사, 외국어, 수학, 물리, 생물, 지리, 측량 등의 기초교양과 기초과학 및 보병, 교련, 사격, 병기학, 지형학, 건축학, 전술학 등의 군사과정을 교육했다. 궈쑹링은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성적이 우수하여 정규반에 입학할 수 있었고 각 과에서 최우수 점수를 받아 장방진에게서 특별상을 받았다. [[1906년]] 조이손이 학당 내에 1년제의 육군 속성 무관학당을 증설하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궈쑹링은 육군 속성 무관학당에 진학하였는데 여기서 동맹회 회원인 청년교관 방성도 등이 혁명사상을 전파하여 궈쑹링은 혁명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07년 속성 무관학당을 수석으로 졸업한 궈쑹링은 북양군 제3진 견습생에 선발되고 견습 기간 만료 후 성경 장문 아문 휘하의 초장[* 소대장.]이 되었다. 궈쑹링은 기강이 해이한 휘하 부대를 엄히 통솔하여 기강이 잡힌 부대로 만들었고 이 덕분에 봉천 육군 통령 주칭란(주경란, 朱慶瀾)은 궈쑹링을 크게 칭찬하고 측근으로 삼았다. [[1909년]], 주칭란이 사천성 성도로 부임하자 방성도, [[청첸]], 강승선, 엽전 등 동맹회원들이 그를 따라갔고 궈쑹링도 주칭란을 따라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10년, 궈쑹링은 방성도, 엽전의 소개로 사천신군의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사천 곳곳에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궈쑹링은 주칭란을 사천 군정부 부도독으로 추대했으나 사천 순방군이 사천의 통치는 사천인이 맡아야 한다고 신군을 배척하자 주칭란은 사천을 떠나야 했고 궈쑹링도 봉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는 동료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 집안이 빈곤하여 노동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독서를 하지 못했다. 후에 궁궐 보초 시험을 볼 때 다만 이름과 주소만 쓸 줄 알았지만 합격되었다. 이후 육군 무비학당에 응모하여 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공부를 못해 전부 독학으로 공부했다. 이후 육군대학에 들어왔고 역시 완전히 독학으로 공부했다. 배우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11년]] 11월 상순, 봉천으로 돌아온 궈쑹링은 장용이 이끄는 연합 급진회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했고 봉천여자사범 부속 소학교 교사 한숙수의 집에 조직을 두고 혁명 관련 모의를 하였다. 하지만 조이손이 이를 알게 되어 장쭤린에게 혁명당원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고 장용을 비롯해 400명의 혁명당원이 처형되었다. 궈쑹링도 체포되어 머리를 깎고 달아나려 했지만 군인 신분증이 있어서 투옥되었고 봉천 육군 속성학당 동기 고기의와 한숙수가 도움을 주어 겨우 처형을 면하고 석방되었다. 한숙수는 궈쑹링과 동향사람으로, 연경대학을 졸업하고 봉천에서 빈민가 아동을 위한 학교 건립, 여중, 어청년회 설립 등의 사회운동을 하였고 이후 궈쑹링과 결혼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