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녀 (문단 편집) ==== 궁녀의 출신 ==== >“궁녀는 오로지 각 관청의 하전에서만 선발한다. 내비(內婢)는 충분히 충원할 수 있으나 사비(寺婢)는 특명 없이는 선발할 수 없다. 양인의 딸은 일체 거론할 수 없다. 양인 사비를 추천하거나 들여보낸 자는 장 60대 도(徒) 1년형에 처한다. 종친부(宗親府), 의정부(議政府)의 시녀는 시녀별감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 >[[대전회통]] 본래 궁녀는 궁노비(宮奴婢)로, 조선 후기에 만든 [[속대전]]과 [[대전회통]] 형전에도 명시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가 구별되었고, 이들도 여러 종류로 나뉘었다. 내비는 내수사(內需司)와 궁방(宮房)[* 왕궁에서 독립된 왕족이 기거하는 주택으로 왕자와 왕녀가 살았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운현궁]](雲峴宮)도 궁방에 속한다.] 소속의 노비는 아무런 제약 없이 궁녀가 되었다. 사(寺)는 절뿐만 아니라 중앙관청도 칭하는 표현으로, 중앙관청의 노비는 특명으로 선발되었다. 내비는 본래부터 왕실 소속이므로 소속이 바뀌어도 문제가 없지만 관청의 노비를 마음대로 선발하는 것은 권한문제 때문에 특명으로 선발한 것 같다. 한편 종친부나 의정부는 두 관청의 권위 때문에 건드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순조]] 1년에야 공노비 제도가 혁파되어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궁녀 선발은 대부분 양인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순조 시대 이전에도 가난한 양인 집안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덜거나 왕실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 딸을 궁녀로 보내길 원하고, 왕실에서도 좋은 출신의 궁녀를 선호하여 편법을 통해 양인 중에서 선발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되곤 하였다. 특히 지밀궁녀는 왕을 가까이에서 모셔서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밀에서 일할 궁녀는 가급적 양인 출신으로 뽑으려고 했다. [[현종실록]]에서는 별감이 법을 어기고 양인을 궁녀로 선발하는 폐단을 문제 삼고 있으며, [[한중록]]에도 [[혜경궁 홍씨]]가 양인 출신을 궁녀로 선발했다가 시아버지 [[영조]]에게 혼이 났다는 일화가 있던 것으로 보아,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지만 공공연하게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혜경궁의 경우에는 사저로 나갔던 시절 친정 청지기(집사)의 딸이었던 [[의빈 성씨|성덕임]]을 데려가 자기 수양딸로 삼았으며, <혜경궁일기>에도 궁녀들을 상궁, 6품 궁녀, 무수리, 기타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로 구별하기 때문에 품계를 받는 사람들은 양인들이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일정 이상의 출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실 전근대 시절 왕실의 보좌를 맡는 시녀들은 중류층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조선 사회도 그 경향이 나타났다 볼 수 있는데, 동시대 일본이나 청나라는 아예 상류층 출신이 시녀로 들어오기도 했었다. 18세기 이후 기록을 보면 중인이나 대궐 [[별감]] 출신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이야 뭐 [[희빈 장씨]]를 보면 답이 나오고,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별감의 딸들을 궁녀로 뽑았다"고 증언했으며 1777년 궁궐 자객 침투사건 연루자였던 호위청 무사 강용휘와 궁녀 강월혜의 관계, [[임오군란]] 때 무예별감 홍재희가 궁녀 복장의 [[명성황후]]를 제 누이라고 거짓말해 업고 나온 것이 통한 점을 보면 가능성이 있다. 별감은 기방을 운영하거나 [[매춘]]을 알선하는 식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의외로 권세가 큰 집단이었다. 거기다 [[구한말]]로 가면 사회제도가 변하면서 서양의 [[시녀]] 영향을 받아 양반, 중인 출신 궁녀들이 많았다. 구한말 외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궁녀는 붉은 두루마기를 입는 경아전 계급에서 선발되었다"고 했는데, 그는 양반에 가장 가까운 역관 가문인 중인 다음에 이들을 거론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상민을 거론한다. 즉 이들은 역관 계급보다는 낮았지만 상민보다는 높았다는 뜻인데, 조선시대 일화를 보면 별감, 사약 계층을 주로 선발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순조]] 이후 극히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궁녀는 원칙적으로 천민 출신이었고 일부만 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시대를 다룬 [[사극]]에도 궁녀들은 대부분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인 [[왜곡]]을 자주 볼 수 있고,[* 애초에 명문가 여식이 궁녀가 되어야 할 이유가 한 가지도 없다. 일단 그 시대 관념상 남자나 여자나 [[결혼]]하는 게 너무나 당연시되었는데, 궁녀가 되면 평생 홀로 늙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보통 집안도 아니고 명문가에서는 애지중지 기른 귀한 딸을 허드렛일하다 처녀로 늙어죽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같은 명문가에 시집보내 마나님으로 대접받으며 살게 하는게 훨씬 낫다.] 심지어 [[동이(드라마)|동이]]에서는 동이가 궁녀로 들어올 때, 다른 궁녀들이 천민을 궁녀로 들인다는 것에 화를 내는 황당한 장면까지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꼭 [[사극]]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는 연구 자료가 부족해서, 궁녀제도나 생활상에 대한 연구는 실제 [[구한말]] 궁녀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이들의 증언에 상당수 의존해 이루어졌다. 그녀들은 조선 왕조 말기, 즉 공노비가 혁파된 [[순조]] 이후 입궁했던 사람들이라 [[노비]] 출신이 아니었고, 또한 [[조선]] 후기 사회 제도의 변화로 애초에 양반과 중인이 많고 상민은 별로 없었기에, 그녀들의 증언을 따르면 '궁녀의 출신은 중인 이상이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가 역사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 수록되었다. 최근에는 연구가 진전되어 궁녀의 다수가 공노비 출신의 천민이었다고 보고 있지만, 이미 뿌리 박힌 오해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 [[효종(조선)|효종]] 대에 궁녀를 공노비에서 선발하는 원칙을 깨고 양인 중에서 선발하려 했던 적이 있는데, [[효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양인들이 딸을 궁녀로 보내기 싫어 내수사의 궁녀 차출 수색을 피해 딸을 숨기거나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들을 [[조혼]]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했다. 결국 양인 궁녀 선발 계획은 무효로 돌아가고, 계속해서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원칙을 유지하게 되었다. 다만 효종 이후로 지밀이나 침방 같은 고위직은 법 따위 무시하고 양인들을 데려오는 경향이 빠르게 형성되었으며 영조 이후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여겼던 건 맞다. 간혹 왕의 승은을 입을 수도 있지만 승은을 입을 가능성도 복권 맞을 확률인 데다가, [[후궁]]이 되는 것은 또다른 어려움이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낳았지만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았다면 후궁 첩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후궁인 [[소용 임씨]]나 [[효종(조선)|효종]]의 후궁인 숙원 정씨, [[숙종(조선)|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 등은 소생이 없지만 궁인에서 후궁이 된 경우이고, [[중종(조선)|중종]]의 후궁인 [[숙원 이씨(중종)|숙원 이씨]]나 [[영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영조)|귀인 조씨]], [[숙의 문씨]] 등은 [[옹주]]만 낳았으나 궁인에서 후궁이 된 경우이다. 그러나 효종의 승은후궁 [[안빈 이씨]]는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를 낳았지만, 효종이 죽을 때까지 정식 후궁이 되지 못했다.][*다만 [[안빈 이씨]]의 경우 궁녀 상태에서 승은을 입은 게 아니라, 효종 즉위 전부터 효종의 [[첩]]이었다.] 대부분의 승은상궁들은 궁궐 한구석에서 쓸쓸하게 살며 일반 궁녀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도 없는 일생을 살아야 했다. 이런 이유로 궁녀는 가세가 워낙 기울어 딸을 궁녀로 보내는 것 외에 경제적 회생 방법이 없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강제 차출로 이루어졌다. 애초에 내수사가 집집마다 돌며 여자아이들을 뽑았다는 데서도, 지원자들이 넘치는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혼인하여 많은 자손을 낳고 키우는 것을 인생 최대의 행복이자 의무로 여겼던 당시 시대 분위기를 고려하면, 혼인도 할 수 없어 자손 없이 늙어갈 궁녀 일을 꺼리는 건 당연한 것이다. 거기다 재수 없이 권력다툼에 잘못 말려들면(...) 물론 양반가나 내명부 윗전들과 관계된 중인 집안 출신 궁녀들은 의외로 자원해서 간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천민 출신 궁녀에 비해 대우가 좋았음을 시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밀이나 침방 같은 상급 부서와 세답방 같은 하급 부서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희빈 장씨]]는 집안이 고위 외교관에 재벌이었음에도 아버지가 자원해서(!) 보낸 사례였다. 물론 그 최후는... 왕실을 받드는 직책인 만큼 본의도 아닌 정치적 사건이나 [[왕비]], [[후궁]], [[왕세자빈]], [[공주]], [[옹주]] 등의 궁중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왕실과 관련된 사건이라 사건조사가 역모사건급으로 가혹하게 진행되는 데다 지체 높은 여인네들을 직접 족칠 수 없으니, 대신 [[의금부]]로 끌려 나와 혹형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처벌 또한 궁녀 자신은 [[거열형]] 등으로 [[끔살]]되는 것은 물론, 가족까지 연루되어 죽거나 유배를 당하는 마당이니, 이 때문에 불똥 잘못 튀기 쉬운 궁녀가 되길 꺼린 것이다. 전세계의 궁녀들이 다 그렇지만, 능력과는 별개로 대부분 미모가 출중한 아이들이 많이 뽑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