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납비리 (문단 편집) === 역사 === [[구한말|멀지 않은 과거]]에 '''[[임오군란]]'''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사(교과)|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의 직접적인 원인이 다름 아니라 [[군량미]](병영식)에 모래와 쭉정이를 섞어준 군납비리였다. 이후 광복과 그 이후 5년 만에 발발한 [[6.25 전쟁]]을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공무원]]이나 [[군인]]들의 윤리관이 성립되지 못한 관계로 벌어진 부분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생활 수준이 높지 못하고 산업시설이 개판이던 [[1950년대|1950]]~[[1960년대|60년대]]에는 국산품의 수준이 워낙 [[개판]]이라서 얼마 되지 않는 국산 군납품 역시 막장인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월남전]] 참전 이후 군복, 군장, 전투식량, 소모품을 국산화하기 전에는 군용 물자 중에 국산 군납품이라는 게 별로 없었지만[* 예를 들면, 한국전쟁 중에 국군이 먹던 [[전투식량]]이나 [[건빵]]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https://panzerbear.blogspot.com/2018/04/blog-post.html|당시 한국은 종전 때까지도 자체적으로는 건빵조차 충분한 양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 소수의 물품마저도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1958년]]에 처음으로 국산 [[비누]]가 국군에 납품됐는데, 이 비누는 비싸다고 기름을 적게 사용해서 반응하지 않은 다른 원료인 [[소다]]가 잔류해 있었고 이 때문에 강한 [[알칼리성]]을 띠어 [[탈모]] 및 피부 통증을 유발했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은 해당 군납비리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5/2017081501826.html|탈모비누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군인 3000여 명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처벌은 흐지부지됐다. 다른 사례로, [[국방일보]]에도 연재된 [[예비역]] [[소장(계급)|소장]] [[최갑석]] [[장군]][* 한국전쟁 당시 [[이등병]]에서 시작해 [[사병 출신 장성|나중에는 장군까지 진급한 인물]]이다.]의 회고담이 있다. 자신이 장군으로 부임하자마자, 부대 주변 지역의 상인들이 [[뇌물]]을 들고 와서 자신들에게 군납 계약을 달라고 하더란다.[* [[군관구사령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개별 군위부대에서 보급품을 조달하는 형식이었고, 1980년대까지 해당 지역의 주변에서 물품을 조달하는 관행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군수지원 시스템이 일원화 되어서 이러한 일은 없는 셈. 다만, 지금도 그런 제도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훗날 기습적으로 [[PX]] 상태를 점검한다든지 혹은 군납품 생산지의 현황을 점검하자, [[곰팡이]]가 슨 [[빵]]이나 산업폐기물로 나온 [[드럼통]]을 땅에 파묻어 두고 [[막걸리]]를 담아 팔면서 거기에 [[쥐]]가 빠져 죽어 있는 것을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041228/1/BBSMSTR_000000010257/view.do|자신이 직접 보기도 했다]]. 본인도 [[현지임관]]한 [[사병 출신 장성]]이었던 데다 병들이 이런 음식들을 먹고 복통이나 병에 시달렸을 것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결국 물품 하나하나의 규격과 청결도를 자신이 직접 지정하고 확인했다고 하니, 당시에 군납비리가 얼마나 사회 전반적으로 보편화됐었는지 짐작해 볼 수가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8676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