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기 (문단 편집) === 고대~근대 === 전근대에는 전술전략의 특성 상 군기는 부대의 심장 그 자체였다. 현대엔 그냥 [[대대]] 이상 지휘부가 지휘부에 모셔두다가 큰 곳 점령해서 사령부 세우면 꽂아두는 수준이지만, 현대 이전까지는 깃발을 정말 전장에도 가지고 나와서 부대의 중심 그 자체로 삼았다. [[메가폰]]도 [[무전기]]도 없는 고대에 수만 명이 뒤엉켜 싸우는 아수라장에서, 군대가 있어야 할 위치를 표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표식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은 군기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전근대에는 공통적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부대 편제는 수백명 단위였고, 이 부대는 진형을 짜서 오와 열을 맞춰 움직였는데, 이때 진형을 짠 한 부대의 병사들을 지휘하는데 쓰인 것이 북, 나팔, 깃발이었다. 당연히 북과 나팔은 소리로, 깃발은 시각으로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런 지휘체계에서 군기는 부대에서 제일 보호받는 물건이었고, 그런만큼 군기는 부대의 중심에 위치했다. 군기를 잃거나 부러뜨릴 지경이 되면 부대 자체가 중심까지 뚫릴 정도로 와해된 상황이며, 이는 부대를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군기는 해당 제대의 진형을 만드는 구심점 노릇을 하기 때문에, 진형 전투가 존재한 시대에는 병사 개인의 '''무기 따위''' 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기물이었다. 만약 기수가 쓰러져 군기를 떨어트리면, 바로 옆의 인원이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주워 들어야 했다. 만약 군기를 다시 들어세우지 못하면 해당 제대가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누군가가 군기를 계속 들고 있는 것은 부대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총기가 등장한 후에도 기관총으로 인해 분대 전투가 보편화 되기 이전에는, 군기는 제대의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전열보병 시대에는 최전열이 총탄과 포탄에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악착같이 생존자가 군기를 다시 들어세워 진격하는 얼핏 기행으로 느껴질 정도로 악착 같은 모습이 흔했다. 척후보병 시대가 되고나면 좀 덜해지지만 여전히 제대 배치의 기준점으로 활용되곤 했다. [[파일:Korean-flags-Captured-flag-with-US-Marines.jpg]] [[신미양요]]때 전리품으로 미 해군이 노획한 어재연 수자기. 전리품으로써 오랜 기간 미국이 소유하고 있으며, 대한민국과 미국이 동맹이 된 지금까지도 '''대여'''만 해준 상태이다.[* 당연하지만 저 사진에는 아무나 세워둔게 아니다.] 전통적으로 적에게서 노획한 군기는 중대한 전리품으로 취급되며, 어지간해선 반환하지 않았다. 특히 서구에서는 과거 잃어버린 군기를 반환하라 요구받아도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반환하는 일이 없다. 군기 자체가 그 부대의 역사 그 자체인데, 이 군기를 전리품으로 탈취한다면 그 부대는 탈취한 군기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걸 반환한다는 것은 부대의 전통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반환에 매우매우 인색하다.[* 비단 군기 말고도 전리품은 찝찝한 배경 하에서 약탈한 것이더라도, 상대국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안 돌려주는게 기본이다. 되려 '''대여료'''를 지불해야할 정도.] 설령 두 나라가 현재 동맹이 되었다 하더라도 쉬이 돌려주지 않으며, 함부로 반환을 요구하기도 어렵다. 서로 용맹을 겨룬 싸움의 증거이자, 승자의 중요한 권리 중 하나로 여겨지기 때문. 고전 시대로부터 이어저오는 유구한 전통이다. [[파일:21186956_7.jpg]] 굉장히 중요한 상징물인 만큼, 아무리 작은 군기라 하더라도 보통은 전혀 작단 생각이 안 날 만큼 크고 아름답다. 전설 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 어느 부대는 군기가 너무 거대해서 200명이 달라붙어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명이 달라붙어야 한다는건 지나친 과장이지만[* 어재연 수자기처럼 부대 중심에 놓이는 최고 상징물로써의 군기는 수십명이 달라붙어야 옮길 만큼 크고 아름답긴 하다. 이 정도로 위풍당당한 군기를 노획하게 된다면 다른 군기들 보다도 더욱 위풍당당한(?) 전리품으로 여겨지곤 하므로, 더욱 반환을 꺼리기도 한다. 어재연 수자기만 해도 아직은 미국이 아류 국가 취급 받던 시절에 해외 원정에서 거둔 빛나는 승리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기념 사진까지 촬영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이 소유하고 있을 정도이니...] 문화재로 남아있거나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군기들을 보면 찢기는걸 막고자 아주 두껍게 만들어졌으며 크기가 어지간한 장정을 둘둘 말고도 남을 정도의 너비를 가졌다. 더군다나 이정도의 너비와 무게를 가진 기가 바람에 나부껴도 깃대가 부러지지 않아야 하고 전장 어디서든 볼 수 있게 상당히 높아야 하기 때문에 굵고 길고 튼튼한 깃대를 사용해서 어지간한 성인 남성 두셋이 달라붙어도 들고 옮기기 쉽지 않다.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서 [[군대]]의 수를 몇 기(旗)로 세고는 하는데, 이러한 사정으로 군기 하나가 곧 부대 하나였기 때문에 사용된 표현이다. 그런 이유로 [[병력]]에 비해 많이 깃발을 세워 페이크를 거는 장면도 나온다. '''바람이 불어 대장기가 부러지니까 싸움에 졌더라'''는 [[클리셰]]도 있다. --가끔 이를 야습의 징조로 파악하고 [[역관광]]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병법에서도 이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오기(전국시대)|오기]]의 [[오자병법]]에선 "키가 작은 자는 창을 쥐어 체력의 약점을 극복하고 키가 큰 자는 활을 들어 높이의 이점을 살리며, '''가장 용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군기를 쥐어주거나 군고(軍鼓)를 치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군고를 쳐서 부대에 지시를 내리고, 군기를 들어 부대의 위치를 알려주기 때문에 이들이 제1목표가 되는 일이 잦기 때문.[* 현대의 [[통신병]] 보직과 대다수 일치한다. 신호로 부대를 지휘한다는 점이나 적의 제 0순위 공격대상인 점 등.] [[로마군]]은 '[[아퀼라]]'([[독수리]]를 뜻하는 라틴어)라는 금/은도금한 나무로 만든 독수리 모양 조각을 장대에 단 것을 군기로 썼는데, 군기를 잃어버리고 그냥 도망친 부대에게 당대에서조차 야만적으로 여기던 로마군의 최고 극형인 '[[10분의 1형]]'을 내릴 정도로 군기의 관리를 중요시했다. 전열에 배치되는 최하등급 군기라 하더라도 부대의 중심, 곧 가장 인원이 밀집된 곳에 자리하며, '''후퇴할 때에도 구심점'''이다.[* 고대 전투에서는 진형이 붕괴된 상태로 추격 당하면서 대부분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전투에서 패해 도망칠때에도 진형이 너무 와해되지 않고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하며 퇴각할 수 있다면 패배한 전투라도 상당수의 인원이 생존 가능한 반면, 진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면 해당 전투에 동원된 부대 '''전체'''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군기가 회수되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 부대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져 실시간으로 병사들이 썰려나가는 극도로 암울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정상적으로 퇴각하지 않고 도주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 이런 식의 무질서한 적전 도주는 진형 붕괴의 여파를 도미노 쓰러지듯 확산시켜 전투에 동원된 부대 전체의 파멸로 직결될 수 있기에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반면 전투 후 군기 근방에서 전사한 시체를 발견하면 명예롭게 싸웠다고 대우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주워들어야 하는 군기가 남은 자리 주변에 쓰러진 시신이 있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부대 최후의 인원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군기를 회수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한 상황에서도 그 주변을 지킨 것이므로 매우 용감한 행동으로 비춰졌다. 설령 졸전으로 부대가 어이없게 무너진 참사였다 하더라도 군기 주변에서 죽은 자들은, 바로 그 참사를 정면에서 제일 먼저 받아 죽은 자들이므로 용맹함을 인정받을만 했다. 로마군에게 있어 군기는 절대적인 상징으로 군기를 모독 당하는 것 이상의 모욕을 찾기 드물 정도였다. 오죽하면 로마군의 전투사례를 보면 사기가 떨어졌을때 군기를 강제로 최전선에 배치하는 초강경수로 역전한 경우가 많았다. [[피드나 전투]] 때는 로마군 선봉이 [[팔랑크스]]의 도산검림(刀山劍林)에 겁을 먹고 나가지 않자, 한 백인대 지휘관이 군기를 뺏어다가 팔랑크스 앞에 던져놓은 것에 자극 받은 병사들이 군기를 되찾기 위해 전열도 안 갖추고 팔랑크스의 정면에 [[닥돌]]해 와해된(...)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상술했듯 군기를 잃어버리면 극형을 당하기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고 돌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서는 브리타니아 원정 당시 해안의 강력한 저항에 상륙을 머뭇거리자 [[10군단 에퀴스트리스|10군단]] 기수가 '''전우들이여, 독수리 군기를 모독시키지 말자! 나는 최고 사령관에 대한 의무를 다 할 것이다'라며 해안으로 나아가자 군단병들 역시 그에 힘을 받아 상륙에 임했다고 한다. ~~결말이 뭔가 이상한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eturn_of_the_Roman_military_standards.jpg]]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와 국교를 회복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크라수스]]의 패전으로 빼앗긴 로마군 아퀼라를 반환하는 것'을 들기도 했을 정도로 군기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 말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한 17, 18, 19 군단의 경우,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다르게 게르마니아 정벌에 비판적이었던 [[티베리우스]]마저 빼앗긴 아퀼라를 되찾기 위한 보복 원정에 나서 [[게르마니쿠스]]로 하여금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족을 추격해 2개의 군단기를 환수하고 아르미니우스가 살해되고 나서야 전쟁을 관두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3개의 군단의 서수를 가진 군단을 창설하지 않았을 만큼 로마에게 독수리 군단기는 단순히 군단 한개의 상징이 아니라 로마군 자체의 상징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앞서 설명한 오자병법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전면전이 펼쳐지면 기수가 항상 먼저 노려지는 대상이였기 때문에 부대에서 가장 용맹한 자가 기수가 되었고, 이 기수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로 여겨졌다.[* 기수는 무겁고 거대한 깃발을 들고 다니느라 적의 무기가 겨눠지는 와중에 반격조차 못한다. 즉 사실상 갑옷 빼면 맨몸인 비무장 상태로 자신을 죽이려 창칼을 겨누는 적을 '''코 앞'''에서 대면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옆의 전우들이 기수가 공격 받지 못하게 적을 견제하겠지만, 자신은 아무런 방어도 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적 면전에 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히 용맹하지않으면 도저히 못할 짓이다. 설령 상대적으로 후방인 부대 중앙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부대가 돌파당하게 될 경우 제일 먼저 군기가 있는 위치로 적이 쇄도할 것이므로 먼저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사태가 터질 경우 해당 부대는 붕괴 위기에 놓인 것인데, 그대로 부대가 와해되어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기수는 군기를 들고 끝까지 진형의 구심점이 되어야만 한다. 전술했듯, 기수가 군기를 버리는 순간 그 부대는 사지에서 빠져나가기는커녕 사분오열되어 적에게 마구 썰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독수리 군기(아퀼라)를 드는 기수를 "아퀼리페르"라 불렀으며 표범, 곰, 늑대 등 맹수 머리가 달린 가죽을 투구 위에 덮어쓰는 장식을 했다. 또한 아퀼라와 함께 원수정 시대부터 황제의 초상(이마고)를 드는 기수 "이마기페르", 각 군단의 군단기(벡실라리움)을 드는 기수 "벡실라리오"가 아퀼라 양 옆에 나란히 서서 행군했고, 군단 예하 각 코호르스(대대/천인대)는 아퀼라 군기에서 독수리를 [[로마식 경례]]를 하는 오른손 모양 조각상으로 교체한 대대기(시그눔)을 드는 기수 "시그니페르"가 편제되어 있었다. 기병대는 길쭉한 용 모양의 군기(드라코)를 드는 기수 "드라코나리우스"가 있었다.[* 이것이 정확히 어느 시기에 생겨난 전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언젠가부터 기병대가 드라코를 드는 것이 전통이 되었고, 다키아 원정에서 다키안 드라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후로는 로마군 이곳저곳에서 군기로 애용되어 로마제국의 최후까지 함께했다.] 이 군기들은 해당 부대 자체와 동일시 되었으며, 해당 부대기를 기울여 하는 경례는 전장에서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우거나 위기에 빠진 아군 부대를 구원하는 등의 위업을 기릴때에나 하는 최고수준의 경례였다. 이 부대기로 하는 경례는 중세시대를 지나 총기 시대를 거쳐 자동화기의 시대가 된 현대에서도 제식 전통으로 살아남았으며, 특히 [[의장대]] 사열식 때 빠지지 않는 퍼포먼스로 활약한다. 의장대란 이름 부터가 바로 '''군기'''를 관리하는 부대니까. || [[파일:roman flag.jpg|width=100%]] || || 로마군의 군기, 좌측부터 아퀼라, 이마고, 벡실라리움, 시그눔, 드라코. || [[파일:external/www.sierratoysoldier.com/SAM021_4(l).jpg]] 근대까지의 일본은 장수가 등에 지고 다니는 군기인 [[노보리|사시모노]](指物)를 차고 싸웠다.[* 좀 규모가 되는 세력은 장수 뿐만 아니라 [[아시가루]]에게도 한명 한명 전부 꽂아줬다.] 물론 시종이 손에 들고 다니기도 했다. 한국사에서도 [[신라#s-10|신라군]]은 옷깃(衿) 색깔을 각 부대별로 통일해서 서로 식별하고 구분할 수 있게 하고,[* 예를 들어 녹금서당(綠衿誓幢) 부대는 초록색 옷깃, 백금서당(白衿誓幢) 부대는 흰색 옷깃을 착용하는 식.] 신라군 공통으로는 [[달]]이 그려진 군기를 들어 아군을 구분했다고 한다. [[파일:조선군 좌독기.svg|width=500]] [[조선시대]]에는 군기로 상술된 수자기, 그리고 좌독기를 사용했다. 좌독기는 검은 바탕에 [[태극]]과 [[팔괘]], [[별자리|성좌]]가 그려진 깃발로 행진할 때는 주장[* 主將, 장수 중 우두머리]의 앞에 세우고, 멈추면 장대[* 군사를 지위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돌로 쌓은 단상]의 앞 왼편에 세웠다. 수좌기는 장수 수(帥)가 쓰여진 깃발로 지휘관 군영에 세웠던 군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