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연맹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1차 대전 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위임통치에 맡기려는 시도를 한다]]. 위임통치안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것이었다. 정한경이 이승만에게 찾아와 이 위임통치안을 제의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원래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제출하려 했으나 참석을 못하게 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대신 미국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삼아달라 요청하기 위해 위임통치안 문서에 서명하여 1919년 3월 3일에 백악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일본은 1차대전 승전국인데다가 국제연맹 창립 회원국이며, 상임이사국이기까지 했으니 열강 그 누구도 이 통치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를 좋다고 받아주면 전세계의 [[식민지]]가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난리가 날 것이 뻔한데 미쳤다고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본의 한국을 다루는 태도를 비난하는 의도가 강했을 뿐,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 자체는 인정되고 있었다. [[박용만(1881)|박용만]], [[신채호]]를 비롯한 반이승만 무장독립파들이 이 사건을 물어 [[이승만]]을 공격하고 같은 외교 독립론은 주장하지만 이승만과 관계없던 세력들도 이승만을 물어뜯으면서 임시정부는 분란이 일어난다. [[안창호]]와 [[김규식]]도 유사한 주장을 했고 영국,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았던 이라크나 시리아, 레바논 같은 중동 아랍권 국가들이 훗날 독립한 사례가 있다. 이후 이승만과 임정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한 번 손을 잡는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뒤이어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무령이었던 백범 [[김구]]가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전달할 특명전권대사로 이승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은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처음엔 직접 상정시키려 했으나 거부당한 뒤 성명서를 작성하고 국제연맹 사무국과 회원국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만주문제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한국이 극동문제의 열쇠이고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연맹의 기본 정신인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각국 대표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언론들도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이 국제연맹 총회에서 [[만주국]] 불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순전히 이 영향으로 그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국제사회에 다시한번 한국 문제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중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