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신문 (문단 편집) === 언론통폐합에서 부활까지 === 1980년 5월 계엄상황 속에서도 편집국 기자들은 총회에서 편집권에 대한 사내외의 부당한 간섭 배제와 급여 인상 등 9개 요구사항을 결의하고, 6일부터 4일간 철야 농성과 신문 제작 2시간 지연 투쟁을 벌여 편집권 독립을 쟁취했으나, 그해 [[5.18 민주화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국보위가 집권한 뒤 사측은 권력에 굴복해 7~8월 사이 언론인 자율정화에 따라 양심적 기자 35명을 해고시켰다. 그러나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은 본사의 종말을 재촉하게 되었는데,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국제신문은 부산일보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는데, 럭키그룹 소유로 경영도 안정되었고 발행 부수도 22만부로 20만부인 부산일보를 앞섰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5.16장학회]] 소유로 친정부 논조를 취한 부산일보에 비해 언론으로서의 신뢰도 더 높았다. 그러나 보안사 측 보고서는 국제신문을 '비판적 성향', 부산일보는 '자발적 협조' 성향으로 분류했고, 결국 국제신문은 "대정부 비판으로 시류에 영합하고 시시비비를 주장하면서 편파성을 노정했다"고 하면서 소유주인 럭키를 겨냥해 '럭키그룹 부정 은폐에 선봉적 역할을 한' 신문으로 보고되어 통폐합 대상사로 선정되었다. 반면 부산일보가 살아남은 데는 소유주인 5.16장학회에 대한 배려도 작용됐을 수도 있었는데, 이미 5.16장학회가 소유한 [[MBC]] 주식 중 민간주식 65%가 [[KBS]]로 넘어갔고, [[부산MBC]] 지분 중 51%가 [[문화방송|MBC 본사]]로 넘어간 관계로 자산 태반을 잃은 장학회를 배려해 부일을 살려둔 것이었다. 반면 국제신문 측은 객관적 조건에서 불리할 게 없다고 자신했지만, 11월 12일에 정순민 사장 등 경영진 3명이 보안사로 불려가 2시간을 버티다 수사관의 강압으로 결국 양도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게 되었다. 이에 본사 기자 50여명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서 별다른 대응책을 내지 못하고 당월 25일에 부일과 합병되는 형식으로 창간 33년, 지령 10,992호로 폐간되었고, 1983년 6월 29일부로 법인 자체가 청산되었다. 합병 이후 부산일보로 편입된 국제 출신 사원들은 여느 통폐합 대상 언론사 출신이 그렇듯 진급과 급료에서 안 좋은 대우를 받다가, 1986년부터 본사 해직기자들과 부일로 이직된 일부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복간운동이 벌어져, 1987년 4월에는 '국제상조회'를 결성해 복간에 필요한 자본주의 물색 및 법적 절차 등을 추진하였다. 그해 [[6.29 선언]] 뒤 언론기본법 폐지로 1도 1지 제도가 사라지면서 그해 12월 하순에 럭키금성이 본지 복간의 의지를 밝혀 이듬해 3월 중순에 법인 등기까지 마쳤으나 시간만 질질 끌었는데, 1988년 5월부터 럭금의 중앙지 인수설이 유포되면서 다시 상조회 중심의 복간운동이 재개되었고, 6월 2일에는 최식림을 중심으로 한 본사 해직사원 10명이 '복간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이틀 뒤에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7월 4일에는 복준위는 '복간추진위원회'로 개편하고 범일동에 사옥을 마련했다. 8월 19일에 럭금과의 끈질긴 협상으로 법인을 인수하여 소식지를 내는 등 복간을 위한 밑밥을 깔았고, 같은 시기에는 문공부에 복간 신청을 내 10월 12일에 등록필증을 교부받았다. 복추위 측은 대기업의 언론 소유가 편집권의 독립성을 해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그런데 이듬해 롯데그룹에 잠시 인수되었다~~ 토착 중견기업인 태광, 부광, 삼도물산 등을 주주로 참여시킨 뒤, 폐간 8주년을 맞이해 ‘국제부활식’을 열었다. 이후 [[1989년]] [[2월 1일]]에 마침내 복간되어 결실을 맺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