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혁명 (문단 편집) ==== 쑨원의 죽음과 [[왕징웨이]]의 집권 ====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쑨원은 봉천군벌 [[장쭤린]](장작림)과 동맹을 맺어 북방을 도모하려 하였다. 1924년 11월, 쑨원은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장쭤린은 돤치루이, [[펑위샹]] 등과 연합하여 [[우페이푸]]를 패퇴하고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쑨원은 1924년 12월 31일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장쭤린 역시 쑨원의 주의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쑨원은 장쭤린의 냉대를 받다가 급격한 병세 악화로 인해 쓰러졌다. 쑨원은 1925년 1월 26일 베이징협화의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고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2월 중순에 퇴원한 쑨원은 베이징의 국민당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생애 마지막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이때 그의 비서로 활약하여 후계자를 자처하게 된 것이 [[왕징웨이]]였다. 3월 12일 쑨원이 사망했고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 안장되었다. 쑨원을 잃은 국민당은 주도권을 놓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린썬]], 쩌우루, [[셰츠]], [[쥐정]] 등 우익성향의 원로들이 중심이 된 '''노(老)동지파''', [[왕징웨이]](왕정위)와 [[후한민]](호한민)의 '''당권파''', 쑨원의 아들인 쑨커(손과)가 이끄는 '''태자파'''가 쑨원의 빈 자리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당연히 당권파가 제일 유력했다. 당권파의 거두인 41세의 왕징웨이는 과거 순친왕 암살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대단한 미남으로 유명했다. 그는 보로딘과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청나라 관료를 지내 고전학문에 능통한 45세의 후한민은 왕징웨이와는 반대로 우익적인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였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었으나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이론가들도 무시할 수 없었고 후한민은 대리 대원수를 지내며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보로딘이 왕징웨이를 지지하여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가 수립될 때 왕징웨이가 만장일치로 국민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 황푸군관학교, 군대의 당대표를 겸했고 장제스는 8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우파 성향의 후한민은 실질적으로 업무가 없는 외교부장으로 좌천되었다.[* 광저우 정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재정부장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랴오중카이가 암살]]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어 [[린썬]], 쩌우루 등의 원로들에게도 국민혁명을 화북에 전파하라는 구실로 사실상 추방함으로 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좌파가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었으며 장제스도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등극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문서 참조. 한편 화북으로 추방된 원로들은 분노하여 [[서산회의]]를 소집, 국공합작의 파기를 선언하고 상하이 당부를 접수하여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하여 국민당은 둘로 분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