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혁명 (문단 편집) ==== [[제1차 국공합작]] ==== 1923년 쑨원은 윈난과 장시의 반 천중민 군벌들과 동맹을 맺고 [[양시민]], 류전환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에게 40만 위안의 군비를 지원하여 광저우를 쳤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천중밍은 광둥 동부로 밀려났고 쑨원은 1923년 2월 다시 광저우에 입성하여 3차 광둥 정부를 수립했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국민당을 재건하기 위해 소련 및 공산당과 접촉했다. [[코민테른]]에서 네덜란드 공산당원 헨드리퀴스 스니블릿이 [[중국공산당|중국공산당원]]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자고 제안했고 채택되면서 국공합작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소련은 국민당이 [[공산주의]]를 실행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나 국민당을 혁명정당으로 인정하고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 중국공산당에게도 국민당과 협력할 것을 지시했다. 그해 9월 장제스가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레프 트로츠키]]와 만났고 [[소련]]의 군사고문단 지원 및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승인받았다. 하지만 소련은 장제스가 역설한 북벌의 필요성에 광둥 정부는 구 [[청나라]]의 토대를 계승한 범국민적인 조직이 아니라면서 북벌이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이에 장제스는 매우 불쾌해하며 소련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쑨원의 비서인 [[랴오중카이]](료중개)에게 주장했다. 장제스는 쑨원에게 소련인들은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협력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으나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는 유일한 열강이었고 쑨원은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쑨원은 소련에서 특별고문인 [[미하일 보로딘]]을 초빙하였는데 보로딘은 쑨원을 개명한 지방총독 정도로 매우 저평가했지만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성심성의껏 국민당에 협조하였다. 1923년 말 광둥 동부로 밀려났던 천중밍의 반격이 시작되자 보로딘은 토지 분배, [[최저임금제]], 휴일 보장을 통한 국민당의 [[볼셰비키]]화를 통해 농민, 노동자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상인과 향신 지지자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쑨원은 보로딘의 주장에 따른 [[레닌주의]] 노선을 국민당 노선에 상당수 포함시켰고 천중밍 군대를 격퇴한 1924년 1월 20일부터 10일 간 국민당 1차 전국대표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종신 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은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정식으로 허락했고 [[삼민주의]]를 대표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때 삼민주의는 크게 개조되면서 오늘날의 삼민주의가 확립되었다. 외국의 통제를 받지않는 자주 국가건설(민족주의), 민족자본에 의한 경제 건설(민생주의), 민생의 권리 향상을 통한 궁극적 민주국가 완성(민권주의)이 그것이다. 그러나 쑨원 사후 중국 공산당은 1차 전당대회 당시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반제국주의 국가 확립(민족주의), 공산주의와의 연대를 통한 민중 해방(민권주의), 노동자와 농민운동 지원(민생주의)가 정통 삼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에는 예비위원을 포함하여 41석의 위원직이 있었는데 그 중 10석이 [[중국공산당]]에 할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