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혁명 (문단 편집) ==== 영한분열 ==== 장제스가 쿠데타까지는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상하이 쿠데타를 허용했던 [[우한 국민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에게 인민 학살의 책임을 물어 출당 조치를 취했고 반혁명의 수괴라고 비난하고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간 협력 관계였던 소련도 장제스가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소련의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는 소련 유학 중이던 [[장징궈]]가 장제스에게 당신은 아버지도 아니라고 비난하는 편지가 게재되었다.[* 그러나 장징궈는 소련의 강압 때문에 서술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장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우한에서는 [[탕성즈]] 등이 우한 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우세함을 들어 난징을 재빨리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우한과 난징-상하이 일대의 경제력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우한 정부는 공산당의 토지개혁과 지주, 토호이던 향신, 자본가 공격으로 인해 내부 소요와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중산층 출신 당원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반면 부유한 난징과 상하이의 경제력 및 혁명의 근거지인 광동을 차지한 장제스는 여러 면에서 우한 정부보다 훨씬 유리한 상태였고 장제스 개인을 지지하는 아편판매 등으로 자금을 풍부하게 마련한 깡패집단인 청방과 자본가들의 협력으로 인해 재정 상태는 비교할 수도 없이 풍족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전체 병력은 우한보다 많았을지언정 북양군벌과의 대치 상태로 인해 즉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적었고 따라서 어느 한쪽이 상대를 손쉽게 압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우한, 난징 각 국민정부는 즉각적인 대치를 회피하고 북벌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