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립중앙박물관 (문단 편집) === 오타니 컬렉션 === [[조선총독부]]가 조선 땅에 전시하고 있다가 패망 이후 챙기지 못하고 두고 간 [[중앙아시아]] 유물 오타니 컬렉션도 소장 중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교토]]의 유서 깊은 [[절(불교)|절]]]의 당주이자 주지[[승려]]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현 중국령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베지클릭 석굴사원, [[막고굴]] 등에서 약탈, 수집해온 벽화 및 온갖 예술품들이다. 이 오타니 컬렉션은 오타니 개인의 재정문제로 3분되어 떠도는 것 중 한 갈래로, 오타니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의 광산재벌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에게 팔아치웠고, 구하라는 친분이 있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 이걸 선물하여 [[평안남도]] [[진남포시]]에 설립한 [[제련소]] 사업의 이권을 얻었다. 이런 경로로 조선총독부에 흘러들어온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는 [[광복]]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에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다른 설로는 [[중국]]에서 국내로 옮겨와 다시 [[일본]]으로 반출 대기 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대로 잔류한 유물이라는 설도 있다. 비슷한 종류의 유물이 역시 베를린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소실되었기 때문에[* 베제클릭 석굴사원의 벽화를 [[독일인]] 알베르트 폰 르콕이 독일로 반출했다. 전시할 때 다수를 박물관 벽에 박아놓아서 옮겨 볼 생각도 못하고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박물관이 전소하면서 영원히 사라졌다.] 세계 희귀본으로서 가치가 높다. 현재 해당 지역을 지배 중인 중국이 반환을 바라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박물관 측은 무시하는 중이다.[* 국제 협약상으로도 책임이 없고, 반환을 요구하는 주체가 없다는 걸 근거로 들고 있다.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민족을 큼직하게 나눠서 봐도 티베트계, 튀르크계, 몽골계로 나뉘는 데다가 위구르의 것이라고 해도 신장은 [[위구르족]] 간쑤성은 [[유고족]]으로 답이 없다. 즉, 명확한 주체따위는 불가능하고 트집 잡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중국 측 입장은 다르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오타니 컬렉션은 [[위구르인]]들이 도래하기 전 [[한나라]]~[[당나라]] 사이에 중국과 [[실크로드]] [[도시국가]] 문명이 남긴 유물이 대부분으로, 위구르족은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한 이후 이 유물들을 파괴한 민족[* [[이슬람교]]는 [[우상숭배]] 금지 교리에 따라 우상 파괴를 해왔다.]이지 이 유물들을 만든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대 [[일본방송협회|NHK]]에서 만든 <[[실크로드]]>라는 다큐멘터리는 [[중앙아시아]] 유적들을 대거 보여주었는데, [[불상]]들 상당수가 목이 잘려 있었으며, 이는 현지에서 [[이슬람교]]가 주류가 되면서 기존 [[불교]] 유적들을 파괴했다는 멘트가 나온다.][* [[한족]]들이라고 이 유물들의 가치를 알아봤던 건 아니다. 막고굴의 문서 등 대부분의 타림 분지 실크로드 유산들은 [[중국인]]들의 무지와 묵인 끝에 대부분이 약탈, 유출당했다.] 다만 이는 [[속지주의]]를 무시한 주장이다. 위구르족이 당나라 시기에야 독립된 실체로서 역사에 등장한다고는 하지만 중세 [[위구르 칸국]]이 멸망한 이후 위구르 난민들이 타림 분지 동부와 [[투르판시|투르판]] 일대로 피난가면서 현지 [[토하라인]]들과 통혼했기 때문에 해당 문화 유산이 위구르인들의 문화유산이 아니라는 근거도 없다. 투르판 분지 역시 전통적으로 [[토하라인]]들과 [[고창회골]]의 위구르인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다만 역사를 속지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건 신중해야 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의 논리로 사용하는 게 속지주의다. 실제로 중국이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옛 고구려인이 만주에 남아 계속 통혼하면서 현재의 동북 3성 한족이 되었다는 논리이다.] 오늘날 위구르인들은 무슬림이므로 위구르인들이 불교 유산에 대해 권리가 없다는 주장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이 중국 불교는 원래 신장 지역을 거쳐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불경을 한역한 승려 중 가장 번역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는 고승 [[쿠마라지바]]가 [[쿠처시|쿠처]] 출신이다. 불교가 유입될 당시 아직 중화문명의 중심지는 화북지방이었고 이 때문에 불교가 신장 지역을 통해 유입되는 것이 당연했다. [[한겨레]] 21에서 이걸 부끄러운 약탈이라는 등 중국의 유물을 빼앗은 투로 써서 비판을 들은 바 있다. 실제로 베제클릭 벽화 등 오타니 컬렉션 대부분은 타림분지의 실크로드 도시국가의 [[토하라인]], 소그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타림 분지]]의 원주민 토하라인들은 [[튀르크]], [[페르시아]], 중국, [[인도]], [[이슬람]] 또는 [[티베트]]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다. 즉, [[타림 분지]]는 역사적으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하던 지역이며, 실크로드는 그 증거이다. 한나라와 당나라시절에는 타림 분지는 한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중국 통일 왕조의 지배를 받지 않은 시기에도 고창국과 같은 [[노수호]] 계열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고창국에서 화폐를 주조할 때 한문을 쓸 줄 몰라서 한문 모양만 어설프게 베낀 문양이 발굴되어 중국 문화권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고, 반대로 복희여와도 같은 전형적인 중국 유물도 나온다. [[복희(중국 신화)|복희]]와 [[여와]]는 [[중국 신화]]의 신이다.] 따라서 오타니 컬렉션이 한족과 완전히 관계 없는 문화유산이라는 주장 역시 논란이 있다. 해당 지역의 경제적 번영은 중국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루어진 부분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지역은 문명의 교류가 활발하던 지역이었으며, 실제로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불교로 대표되는 인도의 문화,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로 대표되는 [[이란]]의 문화가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타니 컬렉션이 가치가 높은 것이다. 즉, 오타니 컬렉션과 중화 문명이 무관하다거나 아니면 다 중화 문명 요소이다 같은 주장은 오히려 이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주장이 된다. 이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는 본관 3층에 있는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실에서 상설 전시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