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립고궁박물원 (문단 편집) == 압도적인 유물 수 == || [youtube(ad_RVDaZP8M, width=640, height=380)] || [[국공내전]] 당시에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국부천대|패주하면서]] [[베이징]]의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 29만 점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유물 60만 8,000점을 선발해서 가져갔다.[* 현재는 약 69만 7,000여점에 이른다.][[http://www.npm.gov.tw/ko/Article.aspx?sNo=03001513|#]] 그 때 명실록 홍격본[* 청나라 때 보관용으로 제작한 명실록 사본이다. 명나라 때 제작된 원본은 홍격본 제작 후 폐기되었다.]과 [[자금성]]에 있던 [[사고전서]] 문연각본 역시 옮겨져 현재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 중이다. 그리고 중국사에서 중요한 문서들도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다. 국내에는 일반적으로 2차 국공내전 후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을 가져간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상당 수 유물은 [[열하사변]] 시기에 일본군의 화북 침략으로 인한 유물 파괴와 약탈을 피하기 위해 [[난징]], [[상하이]]로 대피시킨 것이다. 이후 [[중일전쟁]] 전황에 따라 쓰촨성 오지에 분산 보관하고 있었다. 이 때의 유물 대피 과정은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스토리인데 홍콩 SCMP의 기사의 일러스트만 쭉 봐도 대략 이해할 수 있다.[[https://www.scmp.com/news/china/article/2184268/how-forbidden-citys-treasures-ended-divided-between-beijing-and-taipei|#]] 종전과 동시에 유물들을 다시 [[난징]]으로 옮겼는데 이후 [[국공내전]]이 재발하면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계획을 연기했다가 오히려 베이징 함락 직전 자금성에 남아있던 유물들 중 중요 유물을 난징으로 들고 왔다. 이 유물들 중에서 값어치가 나가는 3,000여 상자만 추려서 난징에서 지룽으로 실어나른 것이 현재의 소장품이다. 서류상으로 고궁박물원 유물의 주인은 대만 정부가 아니라 [[중국국민당|국민당]]이다.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가 총통 자격[* 당시 장제스는 총통직을 사임한 상태였기 때문에 총통이 아니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대만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장제스였다.]이 아니라 국민당 총재 자격으로 유물을 이송시켰기 때문이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날 때 유물을 가져간 것은 무작정 '그냥 다 내꺼야!'하는 개인적 욕심 같은 건 아니었다. 위에서 장제스 본인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장제스는 [[중국/문화|중국 전통 문화]]에 애착이 많았다. 그래서 [[신문화운동]]부터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고 모조리 뒤집자는 공산주의는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의 급박함 속에서도 유물 먼저 챙겨서 온 것이나 훗날 [[중화문명부흥운동]] 등을 보면 중화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finance.people.com.cn/MAIN201209241056000030346790408.jpg|width=100%]]|| || [[동파육]]을 본따 조각한 육형석(肉形石), 17세기. 취옥백채와 더불어 대만 최고의 유물로 손꼽는다. 2019년 2월부터 4월까지는 취옥백채와 함께 자이시 남부 분원에서 전시되었었다. || ||[[파일:external/www.dogdrip.net/fc6b05bee0769b9502302101529026f4.jpg|width=100%]] [[파일:external/www.dogdrip.net/fa39608e21568c73965c76dc0c5e3a10.jpg|width=100%]]|| || 윗부분이 녹색, 아랫부분이 하얀색인 하급 자연 옥을 이용해 여치가 앉아 있는 배추를 조각해 낸 취옥백채(翠玉白菜), 19세기. 2018년 9월 8일 기준으로 본원에 전시되어 있다. [[동릉 도굴 사건]] 때 서태후의 관곽에서 나온 보물이다. || 남부분원 개관 이후 6개월 단위로 취옥백채와 육형석은 교차 전시된다. 특히 이 취옥백채는 돈을 벌어다 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대만 집집마다 하나씩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추 위에 여치와 메뚜기가 올라가 있는 것에서 보듯, 원래는 '''부를 갉아먹는 벌레와 같은 부정부패를 경고하는''' 의미로 제작된 보물이라고 한다. 백채의 발음이 '돈을 벌어다 준다'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기 때문인데 어느 새 전자의 의미(부정에 대한 경고)는 퇴색되고 배추만 남은 것. 대만 집집마다 있고 기념품점마다 지겹도록 널려 있는 옥배추도 취옥백채처럼 생긴 것보다는 그냥 옥으로 다듬어놓은 꽃핀 배추에 가깝다.] [[https://www.npm.gov.tw/exh99/jade/1_ch.htm|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전시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링크는 중국어 페이지)]] [[파일:external/img.epochtimes.com/1406180849481496.jpg]] 국립고궁박물원 내부 식당 '고궁정화'(故宮晶華)[* 타이베이에서 꽤 유명한 호텔인 리젠트 타이베이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다.]에는 육형석, 취옥백채를 흉내낸 메뉴를 맛볼 수 있다. 물론 고급 메뉴에 해당하니 값은 꽤 비싼 편.[* 육형석 요리는 380 NTD(한화 1만 X천원 대), 취옥백채는 220 NTD(한화 8천원 대 중반). 취옥백채는 당연하겠지만 여치와 메뚜기가 올려져 있지는 않고, 새우가 올라가 있다.] 중국 대륙에 남은 곳도 이름에서 ‘국립’만 빼고 [[고궁박물원]]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국부천대]] 이후에 나온 유물들까지 합세해 점점 나아지고는 있지만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보다는 아직 훨씬 못하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지금 대만 고궁박물관의 유물들은 [[청나라|청]] 황실에서 가지고 있던 황실 유물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높으신 분들이 대대로 모은 유물들이다 보니 퀄리티가 상상을 초월한다. 즉 [[중국사 관련 정보|중국사]]에 나오는 대부분의 유물이 있다고 보면 된다. 특히 [[건륭제]]가 수집하여 직접 목록까지 정리한 컬렉션은 압권. 실례로 '''법랑채 자기'''의 명품은 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다. 그리고 [[1940년대]] 이전 발굴된 유물들도 죄다 대만 고궁박물원이 소유하고 있어 발굴유물 수준도 상당히 높다. 소장품이 너무 많아 옥제품·도자기·회화·청동의 작품들은 3개월 단위로 한번씩 유물을 바꿔서 전시하는데 60여년째 겹치는 것이 없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상설배치를 뺀 순환배치 작품들은 '''진짜로 2018년까지 명단이 겹치지 않고 있다.''' 순환배치 작품은 연 8,000여점 정도로, 실제로 '''한 바퀴를 돌리려면 60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남부분원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분원의 목적이 유물의 분산 배치 보다는 대만 북부와 남부 간의 문화 인프라 격차를 줄이는 게 주요 목적이라 많은 전시물이 배치되지 않고 있다. 현대 중국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라 국공내전 이후부터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도둑질한 유물들 내놔라"라고 하는데 [[범람연맹]] 쪽에서는 공산당 불법정권의 억지 따위 알바 아니라는 입장이고, [[범록연맹]] 쪽에서도 "늬들 문화재 [[문혁]]의 풍파에서 보호해준 것부터 감사해라"라는 비슷한 입장이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대만에 대해 "유물 돌려달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데, [[하나의 중국]]을 주창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에 있는 유물의 반환을 요구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국립고궁박물원이 대만의 자랑거리로 남는게 대만인들의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단적인 [[대만 독립운동|대만 독립세력]]들은 "'''타국'''에서 도둑질해 온 것들이니 유물들을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대만 내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라 동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런 주장에 말려들지 않아야 할 필요도 있다.[* 사실 이들은 '동산'인 이 유물들뿐만 아니라 '부동산'인 진먼과 마쭈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진먼현|진먼]], [[롄장현|마쭈]]가 정치적으로 국민당 성향이 매우 짙은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2008년에 [[마잉주]] 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중국 고궁박물원에서 오히려 유물을 대여해준 적도 있다. 원래는 국립고궁박물원에서도 중국 측에 유물을 대여해주려 했는데 중국에서 안 돌려주는 거 아니냐는 불안감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http://www.taipeitimes.com/News/taiwan/archives/2009/02/15/2003436120|기사]][[https://asiasociety.org/blog/asia/museum-diplomacy-taiwan-and-mainland-china|기사2]] 다만 유물의 대부분이 중국 고대의 청동기와 [[명나라]]말과 [[청나라]]대의 유물이라는 것은 단점이다. 아무래도 국민당 정부가 급하게 튀면서 챙긴 것이 대부분인데다가 자금성에 있던 청나라 황실의 입맛에 맞는 유물들을 가져왔으므로 상당수의 유물이 고대 청동기, 그리고 유명한 서예나 그림 작품들, 그리고 명, 청시대의 궁중유물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그래도 고대 청동기와 자기 유물들은 상설전시, 명청대 유물은 순환전시로 진행되고 있어 둘러보는 데 있어서 비율상으로 부족하지는 않다. 그만큼 소장품의 수가 방대하다는 이야기.] 비록 [[문화대혁명]]이 있었지만 50년대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진시황 병마용갱, 마왕퇴, 삼성퇴 등등의 굵직한 고고학적 성과들이 있었고, 나름 체계적인 수집과 기증도 이어졌다. 그래서 자금성의 고궁박물원은 현재 소장품이 160만점,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위상이 같은 [[중국국가박물관]]은 소장품이 100만점으로 소장품 60만점의 국립고궁박물원을 이미 까마득히 뛰어 넘었다. 베이징 수도박물관의 30만점, 국사박물관, 원명원박물관 등등을 합치면 베이징에 있는 유물의 수는 결코 만만치 않다. 다만, 유물 대다수가 손실없이 보관중인 국립고궁박물원과 달리 중국 본토 유물 상당수는 문화혁명당시 깨지거나 훼손된 게 꽤 많다. 그나마,이 와중에도 숨겨서 겨우 무사했던 유물도 많지만 말이다. 그래서 중국의 전체 역사와 전체 지역을 돌아보고 싶다면,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중국국가박물관]]을 찾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이완 섬의 역사를 보고 싶으면 타이난의 국립대만역사박물관이 낫다.[* 전시품은 대다수가 복제품이지만 타이완 섬의 역사를 전시 순서에 따라 잘 보여주고 있다. 유물을 보고 싶다면 그리 추천할만하지는 않으나, 역사를 보고 싶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 그럼에도 중국 고대 왕권의 상징인 [[鼎|정(鼎)]]이 이렇게 널렸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양이 소장되어 있다. 3층에 가 보면 최소 2~3천년 된 고대의 청동 정과 종[* 복제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태가 좋은 유물이 널려있다.]들이 널려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옥 유물들을 위시로 2~3천년 된 옥 유물들이 3층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너무 오래 되어 정확한 연대 측정이 불가능한 토기 잔은 물론 국사 교과서에서 어쩌다 마주쳤을 당삼채(唐三彩) 중에서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전시되었으므로 보기도 전에 실망부터 하지는 말자. ||[[파일:external/www.npm.gov.tw/b5_4.jpg|width=100%]]|| || [[북송]] 때 만들어진 자기인 여요연화식온완(汝窯蓮花式溫碗) || 하여튼 여기 있는 유물들은 중국 역대 왕조가 수천년 동안 계승한 것이다. 즉, 국립고궁박물원은 중화민국이 중국 정통 정부임을 자처할 수 있는 가장 확고한 물질적 유산이기도 하다. 1층의 중국 역사 오리엔테이션 전시실에 가면 중국 역사 마지막 부분이 중화인민공화국도 분단도 아니고 '''중화민국'''으로 되어 있는 것이 포인트. 여기 중국 대륙인 관광객들도 많이 온다는 걸 생각해보면 중화민국의 정통성 강조에 이만한 것도 없다. [[대만]] [[정부]]와 [[중국국민당]], 그리고 국민당원인 유력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중국 관련 유물을 모으고 있는지 [[경매]]시장에 나온 물건들을 [[대만인]]들이 많이 사가서 여기에 기증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진보당]] 정부에서도 국민당 지지하는 외성인들의 민심을 고려하여 유물 사 모으기는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매년 3,000여 점씩 컬렉션이 늘어나는 중. 2015년 이후 컬렉션 증가폭이 커지면서 [[2019년]]에는 상반기에만 무려 7,000점이 추가됐다. 그래서 2019년 8월 [[차이잉원]] 총통이 참석하여 고궁박물원 유물 70만 점 돌파행사도 개최했다. [[2020년]] [[제15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를 앞두고, 차이잉원 총통은 [[2035년]]까지 '''국립고궁박물원 100만 점 돌파'''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한궈위]] 국민당 후보는 100만점 돌파 기간을 [[2030년]]으로 단축하고 모든 유물에 대한 디지털베이스화를 공약으로 내놨다. 그런데 한궈위가 제안한 전 유물 DB화는 이미 추진중인 사업으로 2013년부터 진행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까였다. [[파일:026E4E20-4F85-4FB7-BE0D-18E29AC4C589.jpg]] [[중화우정]]에서 [[2019년]] [[12월]]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는 [[자금성]] 유물들을 소재로 만든 [[기념우표]]. [[중화우정]]에서 만드는 [[기념우표]]들 중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는 유물을 소재로 한 기념우표가 많이 나온다. 중화우정 [[우체국]] 뿐만 아니라 국립고궁박물원 본원과 남부분원에서도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https://www.post.gov.tw/post/internet/Group/index.jsp?ID=150101&news_no=42341&control_type=page&news_cat=4&group_name=post|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