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궁 (문단 편집) == 다른 나라 활들과의 비교 == 현대의 각궁은 기본적으로 민간 각궁이 베이스고, 조선군이 사용하던 전투용 국궁과는 재료나 방식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타국의 전투용 활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감안하고 문서를 읽기 바란다. 또한 이마저도, 개화기~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외형으로 보나 구조로 보나 전통 민간 활 유물들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각궁도 타국의 전통 활들과 비교하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이로 인해, 근래 들어 각궁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단체들의 움직임이 많다. 다만 활의 장력이란 건 그냥 세게 만들고 싶으면 활몸을 두껍게 하면 되는 물건이라, 높은 파운드로 제작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활들 간의 우열을 가릴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장력이 강하단 건 그냥 그 활을 사용하는 사람이 장사였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타국 활들과 비교하기 앞서 이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선의 경우 세조 시기에 천민이나 양인들 대상으로 뽑은 정예 보병 부대인 장용대라는 부대의 입대 조건 중 하나가 100근의 활을 당기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도량형 기준으로 약 141파운드에 달하는 강궁이다. 또한 왕이 이동할 때 호위하는 부대인 만강대의 입대 조건은 120근의 활을 당길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는 약 170파운드에 달한다. 명나라 천공개물에 나오는 활의 장력도 120근이다. 이는 명나라 도량형 기준으로 약 158파운드에 달한다.[* 1근은 명나라의 도량형 기준으로는 596.8g, 조선 기준으로는 641.946g이다. 참고로 현대 한국에서 1근의 무게는 600g이다.] 이처럼 전문적으로 활을 다뤘던 군인들은 장력 100파운드를 넘는 활을 다루는 경우가 흔했으며 활을 장력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일단 유럽의 경우는 영국의 롱보우가 매우 유명하다. 동유럽에서는 [[훈족]]과 기타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의 각궁이 유명하다. 제작방식이 한반도의 각궁과 꽤 유사하다. 또한 역대 중국 왕조와 북방의 유목 민족들의 합성궁은 기본적인 제작방식이 한반도와 매우 유사성이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 중에선 만주나 몽골식 형상에 가까운 복합식 장궁 유물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활은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진 C자형 활에서 여러 나라의 양식을 연구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연구될지는 미지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3px-Yumi-p1000624.jpg]] 일본의 화궁은 목제 복합궁으로 약간 특이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평균 길이가 220cm 정도로 180~200cm 수준인 잉글리시 롱보우보다 더 큰 크기를 자랑하며 활 위쪽이 아래쪽보다 훨씬 긴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크기 때문에 대궁(大弓, 다이큐)[* 여담으로, 한국의 의례용 활인 예궁을 대궁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름대로 행사나 장식용으로 쓰던 것이라 다이큐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 이러한 거대한 활은 헤이안~가마쿠라 시기 사무라이들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로 무로마치 말기~에도시대에는 궁태궁(弓胎弓, 히고유미[* 에도시대에 등장한, 일본의 활 중에서는 가장 발달된 형태다.])이나 중등궁(重藤弓, 시게토 유미[*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의 상급 무사들이 자주 사용했던 활이다.] 등의 종류가 등장했다. 기마사격도 가능하지만 크기가 워낙 큰 만큼 휴대나 편의성 면에서 아무래도 불편함이 있긴 하다. 그리고 일본 활이 단일 목궁으로 제작하여 습기에 대한 내구성이 높다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 일본 활도 여러 나무들을 아교로 조합해 만든 복합궁이라 습기로 인해 아교가 녹을 가능성이 있어 옻칠 등 관리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일반적인 합성궁들처럼 습기에 약하다. 그리고 위력이 약하다는 편견도 있으나 각궁 같은 합성궁 수준은 아니어도 위력 자체는 무난하게 나온다. [[파일:external/classic-bow.com/turkish_bow_01.jpg|width=500]] 최고의 활을 꼽을 때 언급되는 터키 각궁. [[http://www.google.co.kr/search?q=Turkish+bow&hl=ko&newwindow=1&sout=1&biw=1440&bih=773&tbm=isch&gs_l=img.3...6325.9021.0.9275.14.14.0.0.0.3.333.1914.6j2j3j2.13.0...0.0.sdGDC_Kydnc&oq=Turkish+bow&aq=f&aqi=g-L2&aql=|시위를 당긴 모습도 검색해보자]]. 시위가 없을 때의 독특한 모양이 유명하다. 시위를 걸면 명나라 장궁과 비슷한 선을 그리고, 당기면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탄성이 높은 모양을 보인다. 활을 자주 쓴 민족답게 이밖에도 다양한 활이 있었다. [[파일:external/www.atarn.org/viable_for_stringing.jpg]] 만주족의 각궁. 가까운 한국 활보다 크고 두꺼워 내구성은 높지만, 탄성이 약해서 비거리가 짧은 편이다. [[만주족]]의 만주 활은 유목민족의 활 중에서 가장 거대하며, 비거리는 짧지만 저장되는 운동 에너지(J)가 높아서 무거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기마 사격에는 비거리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발달한 특색이다. 궁기병들은 속력을 이용하여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목표물을 정확히 쏘고 지나치는 공격 이탈 능력, 무거운 화살을 이용하여 일격으로도 확실히 살상력이 보장되는 '빠른 단발 사격'이 가능한 활을 선호했다. 한반도에서도 기마병을 많이 편성했던 시대에는 투박한 만주 활을 닮은 국궁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국궁은 약간 작지만 부려놓으면 만주 활과 비슷한 형상이 되며, 고려시대의 활은 만주 활과 쌍둥이처럼 닮은 것도 있다. 특히, 한반도에서 기병의 편성 비중이 높은 시대일수록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국궁은 만주 활과는 정반대로 고탄성 활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조상들은 [[만주]] 지방의 활을 비교한 예시가 많다. '''"만주 활들은 너무 투박해서 크기에 비하면 성능이 웃음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습기에는 우리나라 활보다 훨씬 강하므로 단점만 보면 안 된다. 우리도 장마철에 쓸만한 활을 만들려면 본받을 점이 많다."'''라고 비평과 반성을 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만주 활은 궁기병에게 중요한 짧은 Draw Length와 파괴력을 중시했고, 한반도의 국궁은 탄성이 높은 재료를 이용하여 비거리와 연사력을 중시했다. 즉, 국궁은 극단적인 탄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탄력이 매우 낮은 만주 활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녔지만, 목재 복합궁은 쌍둥이처럼 닮은 거대한 장궁을 병용해서 만들었기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연구결과, 고려시대 활이 만주 활과 매우 닮았던 것은 물론이고, 보병용 고탄성 활을 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조선시대에도 만주 활처럼 투박하고 큰 목궁을 스스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요, 목제 강궁이 부족할 때는 만주 활을 수입해서 병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궁과는 형태적으로도 서로 유사하고, 여러모로 국궁과는 교류가 많았던 활이라고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archerynews.net/img_20100824170115.jpg]] 부탄 죽궁. 출처는 [[http://archerynews.net/|국궁]][[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msection=8&ssection=31&idx=452|신문]]. 2007년 국내에서 열린 세계민속궁축전에서 한국 각궁과 더불어 120m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데 성공한 유일한 활이었다.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30/read?articleId=16458534&bbsId=G005&searchKey=subjectNcontent&itemId=75&sortKey=depth&searchValue=마도카+활&pageIndex=1|대나무 재질인데도 뛰어난 성능]][* 본문 하단]을 보여줬는데, 이것은 부탄 지역의 특수한 [[대나무]] 덕분이다. 당시에 참석한 현대의 몽골, 터키, 헝가리 각궁은 부탄 죽궁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는 부탄에는 근대까지도 '''전투용 활'''의 맥이 남아있었으며, 현대까지도 활이 스포츠로서 발달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활은 사용자와 필요성이 갖추어져야 발전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질이나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활의 성능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교훈도 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