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내전 (문단 편집) === 회해 전역 === 다음은 [[제남]] 전역에서 승리한 중공군의 [[서주]] 공략이었다. 중공군은 화둥 야전군과 중원 야전군 소속 32개군 등 도합 60만 대군으로 공세에 돌입했다. 이에 맞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도 60만이었지만 이들은 제남 전역의 패배와 사기 낮은 군벌군들의 혼재로 인하여 불안정했다. 사령관 유치는 수세적인 전략을 추구했으나 59군과 77군의 반란으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공군은 서주의 핵심 교통로인 농해 철도를 장악하고 황백도가 지휘하는 제7병단을 포위했다. 구정천의 2병단과 이미의 11병단이 구원하려 했으나 중공군에게 제지되었고 구정천은 황백도랑 사이도 나빴던지라 11월 22일에 있었던 7병단의 전멸과 황백도의 전사를 수수방관했다. 상황이 이런 모양이니 일사분란한 중공군의 공세에 국민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7병단의 패배로 국민혁명군 18개 사단이 전멸했고 서주의 국민혁명군은 남북으로 갈려 고립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서주의 요충지 숙현을 탈환하여 진포 [[철로]]를 다시 개통한 다음에 서주의 병력을 철수시켜 [[난징]]의 방어를 강화하려 했으나 중공군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국민혁명군 12병단이 또 중공군의 공세에 포위되었다.[* 중공군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해 퇴각하려는 순간 습격을 당했다.] 결국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서주 포기를 명령했으나 마오쩌둥은 즉각 퇴각하는 두위밍을 습격, 두위밍 휘하 30만 병력을 포위해버렸다. 12월 15일 12병단이 전멸했고 17병단도 역시 전멸했다. 1949년 1월 6일 총공세로 두위밍 역시 패배, 30만 병력이 증발했으며 두위밍은 1월 10일에 포로로 사로잡혀 전향하게 된다. 국민혁명군은 이 전투에서 또 55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회해 전역의 패배는 정면 대결에서조차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내의 분열로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리쭝런]]이 총통 대리에 취임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장제스의 비서 [[천부레이]]가 1948년 11월 난징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결]]하고 장제스의 맹우인 [[다이지타오]]도 1949년 2월에 [[광저우]]에서 자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