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내전 (문단 편집) === [[국공합작]]과 제1차 국공내전 ===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중화민국 북양정부|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청나라]]는 멸망했으나, 초대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중앙 정부를 장악하여 [[쑹자오런 암살 사건]] 등 정적을 암살하고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국회를 무시하고 차관을 빌려오는 등 독재 정치를 폈고, 이에 반발하던 국민당은 [[계축전쟁]]을 일으켜 2차 혁명에 나섰으나 2달 만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감행하고 초급 총통제 실시로 [[황제]]적 지위를 누렸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을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차이어]], [[량치차오]]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켜 맞섰고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면서 열강들도 지지를 철회하자,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려 제제를 취소하고 3달 만에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후임 대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 회복을 선포하고 [[8월 1일]] 국회가 다시 열리면서 상황이 좀 진정되나 싶었는데 [[돤치루이]]의 [[독재]]로 [[호법전쟁]]이 발발하고 결국 중국은 [[중화민국/군벌|군벌]]들의 [[군웅할거]]의 난세에 돌입했다. [[쑨원]]은 이런 군벌 세력들을 정리하여 진정한 통일 공화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한편 갓 건국되었고, 당시 서방 국가들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소련]]은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자신의 우방을 늘리려고 했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이 국민당에 협력하는 방침을 채택했고,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가진 채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국민당은 [[광둥성]]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 대륙은 여전히 군벌들이 난립하던 상태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원조로 군대를 양성하여 [[국민혁명]]에 나섰고, [[중국공산당]]도 이에 협력하여 중국은 [[중국국민당]]의 주도 하에 통일되는 듯 했다.''' 하지만 [[쑨원]] 생전부터 공산당과 국민당의 사이는 상당히 삐걱거렸다. 쑨원 본인부터 [[미하일 보로딘]]의 볼셰비키적 개혁에 대해서 중국엔 맞지 않는다고 거부했고 소련도 쑨원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등, 국공 합작은 중국의 공산화라는 목표를 볼 때는 잠시 거치는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에서 우파들은 숫자도 얼마 안 되는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을 잡아먹고 있다고 크게 불만스러워했으며 향신,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군관이나 중산층 당원들도 공산당이 자신들의 사유 재산을 건드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이 [[후한민]]을 중심으로 한 동맹회 중심의 '''노동지파''', 쑨원의 아들 [[쑨커]]를 중심으로 한 '''태자파''',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직계의 '''당권파'''로 갈라졌을 때도 가장 세력이 센 당권파 내부에서도 후한민의 우파와 왕징웨이의 좌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1925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장제스]], [[미하일 보로딘]]과 힘을 합쳐 [[후한민]], 쉬충즈 등을 숙청했고 장제스와 함께 국민당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1926년]] [[중산함 사건]]이 터지면서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키산카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적대적인 소련 고문들을 강제 귀국시킨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까지 친소 용공파로 인식되던 장제스는 차차 우익으로 변해갔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 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이후 국공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공산당은 왕징웨이 등의 국민당 좌파와 연합, 장제스를 군사 독재자로 비판하면서 북벌을 계기로 강성해진 장제스를 실각시키려고 했다. 특히 미하일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 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이에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난징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이후 소련의 방침이 바뀌어서 갑자기 공산당에게 자체적인 무장 세력을 조직할 것이며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를 장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코민테른]]은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공산당 방침을 통보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국민당을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했다. 그제서야 공산당의 목표가 국민당 장악이라는 걸 알아차린 왕징웨이도 [[국공결렬|국공합작의 파기를 선언했다.]] 중국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가 합작을 파기하기 3일 전 선제적으로 합작 파기 선언을 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8.7 긴급회의]]로 [[천두슈]]를 몰아내고 [[취추바이]], [[리리싼]] 등의 지도를 받아 [[난창 폭동]],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 [[창사 폭동]]을 일으켜 중요 도시를 장악하려고 반격 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고, [[마오쩌둥]], [[주더]], [[장궈타오]]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홍군]]이 [[정강산 투쟁|정강산 해방구]]를 비롯하여 양쯔강 이남의 15군데에 달하는 소규모 해방구를 설립한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는 [[초공작전]]을 벌여가며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후 상하이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던 강서성 중앙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토지 개혁으로 농민들을 징집하면서 내전을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제3차 초공작전]] 이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 마오쩌둥과 보구를 비롯한 상하이 임시 당 중앙의 노선 갈등이 심각해졌고 [[제4차 초공작전]]에 즈음하여서는 마오쩌둥이 결국 실각했다.''' 이후 [[오토 브라운]]과 소련 유학파가 혁명을 지휘했지만 [[1933년]] 시작된 장제스의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당은 궤멸 위기에 몰렸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잔존 병력과 당원들을 재편하여 부대별로 해방구를 탈출하여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국민혁명군]]과 각 지역 군벌과의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도 핵심 당원을 보존한 채 중국 북서부의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옌안]]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을 [[대장정]]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