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내전 (문단 편집) === [[옌시산]]의 몰락 === 한편 40여년 간 산시성을 지배하며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여 온 옌시산은, 군벌들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강한 전투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의지와 전투 능력이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이미 1947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옌시산은 [[인민해방군]]에 참패했고 [[베이핑]]이 함락되자 인민해방군의 정면 공격에 노출되어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48년 9월 28일 녜룽전이 산시성 침공을 개시했고 옌시산은 8만 명의 병력으로 맞섰지만 잇달아 참패하고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옌시산은 투항한 일본군과 후쭝난이 공수해준 지원군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옌시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공산당 간첩들과 변절한 부하들을 모조리 색출해 목을 매달아버린 다음에 타이위안 전체를 폭파시킬 준비까지 하는 악독한 각오로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옌시산의 처절한 저항에 녜룽전은 타이위안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인민해방군의 초점이 베이핑 함락에 집중되면서 옌시산은 잠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핑이 함락되자 옌시산은 엄청난 대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자도 병력도 부족했던 옌시산은 1949년 2월 난징으로 가서 리쭝런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리쭝런도 당장 제 코가 석 자라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편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인해 옌시산은 다시는 산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당의 전향 제안을 거부하고 끝까지 맞섰으나 [[인민해방군]]의 공세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4월 24일 타이위안이 함락됨에 따라서 산시성도 무너졌다. 이제 후쭝난, 바이충시 정도를 제외하면 국민당이 믿을 수 있는 병력은 없다시피 했다. 한편 [[난징]]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옌시산은 행정원장 겸 국방장관에 임명되지만 결국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달아나는 처지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