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내전 (문단 편집) === 평진 전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PLA_Enters_Peking.jpg|width=100%]]}}}|| ||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 당연하지만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만족하지 않고 즉각 남진을 개시했다. 이미 요심 전역이 끝나기 전부터 [[산둥반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9월 23일 성도 [[제남시]]가 중공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1948년 11월부터 중원 야전군이 회해 전역에 돌입, 두위밍에 맞섰다. 두위밍은 중공군을 이기지 못하고 참패했고 이러한 패배의 배경엔 장제스의 무리한 간섭과 병크들이 있었다. 이어 평진 전역에서 국민혁명군은 참패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베이징]]을 포위한 린뱌오의 부대는 국민혁명군 수비 사령관 [[푸쭤이]]를 설득하여 무혈 입성했다. (평진 전역) 장제스는 푸줘이에게 독전 편지를 보내는 등, 사수할 것을 권했으나, 푸줘이는 공산당원이었던 딸의 설득으로 시를 공산당에 무혈로 넘겼다. 장제스는 중앙군이라도 빼려 했으나 푸줘이의 비협조로 인해 그것도 실패했다. 다만, 무혈로 넘기는 항복 조건으로 공산당은 베이핑을 수비하던 국민혁명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포위망을 열어주었다. 이 덕분에 [[베이징]] 시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항복 회담장에서 푸쭤이가 한 말은 한마디, "나에겐 죄가 있습니다(我有罪)."였다고 한다. 항복을 결정한 뒤, 참으로 복잡한 심경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공산당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이후 푸쭤이는 중국의 수리부(水利部) 장관을 20년간 역임하는 등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여하튼 베이징의 함락으로 중공군은 화베이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어차피 푸쭤이가 베이핑에서 농성을 했다고 한들, 보급이 단절되고 완전히 포위된 국민혁명군 수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며, ~~베이징의 수많은 문화재들만 작살내고.~~ 중공군의 진격을 몇 주 늦췄을 뿐이며, 어차피 결과는 국민당이 완전히 참패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정부는 150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