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결렬 (문단 편집) === 중국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 === 1927년 4월 27일[*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의 기술, 이건일의 모택동 VS 장개석은 5월 1일이라고 적고 있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우한에서 중국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왕징웨이]], [[탄옌카이]], [[쑨커]], [[쉬첸]] 등 국민당 인사들이 공산당원들을 환영했고 지금까지 개최된 대표대회 중 가장 성대한 대회가 열렸다. 5만 7967명의 공산당원을 대표하여 80명의 대표자와 코민테른 대표단, 국제노동자 대표단, 왕징웨이를 비롯한 우한 국민정부의 20명의 외빈이 참석했다. 하지만 광저우와 상하이의 당부가 궤멸당한 상태라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강경한 토지혁명을 주장했고 [[취추바이]]는 <중국 혁명의 논쟁거리>라는 소책자를 배포하며 천두슈의 측근인 선전부장 팽술지(펑수즈)를 공격하며 천두슈를 우경 기회주의자라고 돌려서 비판했다. 차이허썬 역시 마오쩌둥의 입장을 옹호했다. 중앙국은 마오쩌둥을 기존의 농민운동위원회에서 옮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하여 당조직 서열 32위에 오르게 했으며 향후 국민혁명이 토지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농민정강>을 결의했지만 본질적으로 강경론을 배척하고 코민테른 제7차 확대회의의 <중국문제결의안>에 따라 '중국혁명의 특성은 소자본계급이 반드시 무산계급과 함께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민당과의 합작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소련과 연합하여 국민당 좌파의 용공인사들을 포섭하는데 주력했다. 대회 결과에 불만을 품은 마오쩌둥은 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한에서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당은 아직 [[천두슈]]의 지배 아래에 있었지요. [[장제스]]가 이미 반혁명을 이끌면서 상하이와 난징에서 공산당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천두슈는 여전히 우한 국민정부에 대해 계속 자제하고 양보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 나는 당의 정책에 너무 실망했어요. 특히 농민 운동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했지요. (...) 하지만 천두슈는 격렬하게 반대했어요. (...) 결과적으로 제5차 전국대표대회는 대혁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열렸는데, 적절한 토지 개혁안을 통과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토지 투쟁을 신속하게 강화시키자는 나의 의견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어요. 천두슈가 장악하고 있던 중앙위원회가 내 의견에 대한 심의를 거부했기 때문이지요. 당 대회는 지주를 "50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이들로" 규정함으로써 토지 문제를 묵살한 꼴이 되고 말았지요. 이는 계급 투쟁을 전개해 나갈 토대로서 전혀 부적절하고 비현실적이었으며, 중국 농촌 경제의 특수한 성격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이었어요." 우파의 공격이 거세지는 와중에서도 유화정책을 주장하는 천두슈의 당내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