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결렬 (문단 편집) === 공산당의 국민정부 탈퇴와 우한의 분공 === 일단 왕징웨이는 곧바로 분공을 결정하지는 않고 소련의 반응을 살폈다. 1927년 6월 중순, 왕징웨이는 소련에 1,500만 루블의 차관을 요구했지만 오직 200만 루블만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소련에서 왕징웨이를 회유하기 위한 당근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왕징웨이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한 국민정부를 지원하는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만약 왕징웨이가 조건부로 5월 지시에 찬성했다는 로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련의 미적지근한 지원은 왕징웨이로 하여금 분공을 결정하게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펑위샹-왕징웨이 회담이 열려 우한 국민정부는 하남을 펑위샹에게 넘겨주고 펑위샹에게 북부의 방위를 맡긴 후 탕성즈 부대를 우한으로 철수시켰다. 장제스는 우한 정부가 양호 지방의 방비를 굳힌 다음에 광둥이나 난징을 공격할 것이라 확신하여 펑위샹과의 제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6월 12일 왕징웨이와 만나 우한과의 제휴를 약속했던 펑위샹은 6월 20일, 쉬저우에서 장제스를 만나 협력을 약속했다. 6월 21일 펑위샹은 장제스와의 합작을 선포하며 난징-우한 간의 전쟁을 반대하며 공산당과 보로딘을 비난하고 나섰고 결국 쉬저우 회담에서 장제스와 만나 우한이 아니라 난징과 손잡고 난징의 경제적 지원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펑위샹-장제스는 연명 북벌통전을 보내 영한 통일을 호소하였고 펑위샹은 우한의 북벌 협조, 공산당원 축출 등을 요구하며 반공으로 완전히 전향했다. 우한은 믿었던 펑위샹으로부터 배신당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장풍합작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의 해당 단락 참조. 그러던 중 6월 27일 탕성즈는 장제스가 산동으로 진출한 틈을 타서 난징 공격을 결정했다. 우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쑨촨팡, 장쭝창 등이 난징을 향해 남하했고 [[장제스]]는 봉천과의 휴전을 모색하는 한편, 7월 3일 [[왕정팅]]을 뤄양으로 보내 [[펑위샹]]에게 우한 정부가 난징 정부와 일치된 행동을 취하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펑위샹은 이를 수락하여 수차례 전문을 보내 다음 사항을 요구했다. * 첫째, 보로딘은 전문을 받은 후 5일 이내에 우한을 떠나 귀국해야 하며, 기한을 넘겨 떠나지 않을 시는 구금될 것이다. * 둘째, 공산당을 반대하는 청당운동을 즉시 선포해야 한다. * 셋째, 정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축출해야 한다. * 넷째, 공산당이 조종하는 대중단체를 모두 폐쇄하도록 한다. * 다섯째, 천두슈와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여 억류해야 한다. * 여섯째, 덩옌다를 해외로 보내 그의 모든 직책을 박탈해야 한다. 공산당원들은 펑위샹이 장제스를 도와 분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보로딘은 "펑위샹 장군은 우리들의 친구이며 나의 친구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두슈]]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강경파 당원들을 제지하면서 우한의 장령들이 더 이상 반공 폭동에 참여하는 일을 막기 위한 유화책을 선호했지만 7월 12일, 그를 기회주의자로 여기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지도부를 개편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면서 밀려나고 말았다. 가뜩이나 지난 7월 4일 상하이에서 아들 천옌녠이 처형당해 우울증에 시달리던 천두슈는 7월 14일 자취를 감추었고 다음날인 7월 15일 자신을 총서기직에서 해임해달라는 요청을 당중앙으로 보냈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은 강경파 [[취추바이]]가 영도하게 되었고 [[장궈타오]], [[리웨이한]], [[저우언라이]], [[리리싼]], [[장타이레이]] 5인으로 구성된 중국공산당 중앙 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한편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의 긴급 명령이 하달되었다. >"국민정부에서 탈퇴하는 데 그치고 국민당에서는 탈퇴하지 말 것. 국민당의 지휘기관이 다수의 공산당원을 배제해도 내부에 머물러 있으면서 국민당의 하층 대중과 긴밀히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중앙에 단호하게 반항하는 결의안을 제출케 하며 현 국민당 지도기관의 교체를 요구할 것. 이러한 지령에 따라 [[7월 13일]], 농정부장 담평산 등 중국 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며 우한 국민정부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했다. 이틀 후인 [[7월 15일]], [[왕징웨이]]는 중앙상무위원회 확대회의 석상에서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폭로하며 분공을 정식으로 제의했고 결국 중앙상무위원회는 분공을 결정했다. 7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도 공산주의자들을 요직에서 축출하자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공산당과의 합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진 않았기 때문에 '본당의 주의와 정책에 위반한 일체의 언론, 행동을 제재한다'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제국주의자를 기쁘게 하고 정치위원회가 악명을 뒤집어 쓴다'는 이유로 분공 결의를 공개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7.15 반혁명 정변이라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7월 23일, 새로운 코민테른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와 하인츠 노이만이 중국에 도착했다. 로미나제는 중국 공산당이 우경 기회주의적인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다고 맹비난하며 임시 당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8.7 긴급회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산당이 왕징웨이와 우한 측에 대해 '반혁명을 원조한다'라고 비난하자 7월 26일 왕징웨이는 정책통일결의안을 채택하여 전 기관에서 공산당원을 배제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7월 27일 [[미하일 보로딘]]이 6명의 소련인과 함께 한커우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7월 28일 장제스는 보로딘이 추방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우한이 무너지고 보로딘이 추방되었다. 이로써 당, 국가의 기초는 위기로부터 안태로 전환할 수가 있다. 1년 반에 걸친 고투 속에서 한때도 마음의 편안은 없었지만, 이제 비로소 대악이 제거되고 뜻이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쑨원|총리]]에게 변명할 여지가 생기고, 혁명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장제스의 1927년 7월 28일 일기|| 이후 우한 국민정부는 8월 5일 공산당의 단속을, 8월 8일 공산당 간부 체포령을 하달했다. 8월 13일 장제스가 하야를 선언하면서 우한과 난징은 [[영한합작]]의 단계에 돌입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와 원조를 받아 반격을 위한 폭동과 봉기에 돌입했다.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이 일어났으며 9월 9일에는 [[추수폭동]]이 일어났다. 마오쩌둥 등 강경파는 민주적 혁명정부를 설립하고 더욱 급진적인 사회정책을 전개하며 국민당의 기치를 버릴 것을 요구했지만 로미나제는 이를 군사 모험주의로 지칭하며 반대했다. 한동안 우한과 난징의 통합이 국민당 내부의 분열로 인해 공산당은 우한 국민당 당부의 명의를 사용하였지만 통합의 걸림돌이었던 [[장제스]]가 하야하고 9월 15일 국민정부가 난징에서 완전히 통합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국민당의 이름에 기대를 걸 것이 없어졌다. 1927년 9월 19일, 스탈린으로부터 국민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지령이 내려졌고 9월 20일, 한커우의 소련 영사관을 통해 취추바이에게 스탈린의 지령이 전달되었다. 1927년 11월 7일부터 11월 14일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임시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취추바이]]는 [[8.7 긴급회의]]에서 결정된 토지혁명과 유격전 무장투쟁,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기본노선을 재확인하고 국민당 혁명위원회라는 껍데기를 탈피하여 소비에트 건설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11월 확대회의는 좌경맹동주의가 강화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당 정체성 확립과 노동대중과의 일체성 확립이 요구되었다. "당조직의 볼셰비키화 및 무산계급과 농민군중 조직의 혁명화"가 당면과제로 인식됨에 따라 각급 당 지도기관의 철저한 개조를 임무로 설정했다. 이로써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완전히 나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