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호기사단 (문단 편집) === 창설과 십자군 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a747cab67ffa9f0d2428b1414abe5e3.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6272234623_7b7879e216_z.jpg|width=100%]]}}} || [[600년]] [[예루살렘]]에 설립된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시초로서, 본래 구호 활동을 담당하던 곳이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들로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의료 봉사를 계속 했다. 이들의 이러한 기원은 그들이 유연하게 살아남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성전 기사단]]은 보호할 [[성전]]과 전투가 없으면 존재 가치를 잃기 때문에 실제로 사라져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병원 기사단은 전투가 없어져도 의료 봉사를 하면 되었으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1113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황명으로 [[기사단]]으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방어와 같은 소극적 전투 활동에 국한되던 활동 영역이 이후 순례자들의 경호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계속적인 조직 확대를 통해 거대한 군사 조직이 되었다. [[검은색]] 겉옷에 그려진 흰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으며,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전쟁의 주력으로서 [[이슬람]] 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창설 초기에는 신앙심만으로 참여하는 귀족들이 많았으나 후대로 갈수록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유럽은 장자 단독 상속제다. 그 아래 자식들은 빌어먹든 굶어죽든 알아서 살아야 했다. 이들은 보통 기사, 사제 등이 되었고, 집에서는 재산을 물려주지는 않아도 기사나 사제가 되는 데 필요한 지원 정도는 해 주었다. 물론 게르만 족은 원래 자식들에게 동등하게 유산을 분배하는 상속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로 인해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기 어러워 점차 장자 상속제로 바뀌었다.] 차남, 삼남 같은 갈 곳 없는 귀족 자제들이 주요 인재 풀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힌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사수한 전력이 유명하다. 당시 이슬람 세력을 이끈 [[누르 앗 딘]]과 [[살라흐 앗 딘]]도 이 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난 적이 있다. 당시 한 [[무슬림]] 작가는 이 성을 두고 '무슬림의 목에 걸린 가시'로 평할 정도. [[1271년]]에야 이 성이 함락당하는데 이때 상황이 참 드라마틱하다. 당시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지키던 구호 기사단의 병력은 수백 명 정도였으나, 그 몇십 배에 달하는 [[맘루크 왕조]]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그러자 맘루크군을 이끌던 [[바이바르스]] 1세는 교묘한 방법을 이용했다.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 1세]]의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비둘기]]로 성 안에 보낸 것. 여기에 속은 기사단은 성을 내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이바르스는 항복한 기사단원들을 살려줬다는 것. 다른 해석으로, 기사단의 무사 철수를 전제로 한 협상의 결과로 성을 내주고 철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수백 년간 난공불락이던 요새가 이런 얄팍한 속임수로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납득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바이바르스의 크라크 데 슈발리에 포위 공격은 성채 주변의 12개 요새(성채 방어를 위한 전초 기지)를 먼저 함락시켜 성채를 고립시킨 후 진행한 것이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시리아]] 지역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이었다. 즉 시리아 일대의 십자군 세력은 다 패배하여 밀려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이외에는 다른 거점이 없었으니, 저항해봤자 시리아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을 지켜낸다는 상징적 의미 말고는 얻는 게 없다고 기사단 수뇌부가 판단했다는 것.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세력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이던 구호기사단이 무의미한 방어전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레반트 해안 지역에서 아직 명맥을 이어가던 다른 십자군 국가들을 방어하는 데 합류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즉, 세력을 보존한 상태로 다른 십자군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무사 철수를 조건으로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포기하고 물러나거나, 얄팍한 속임수에 속아넘어가는 척하고 물러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