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태 (문단 편집) == 관련 기록들 == 아래에 기록이 만들어진 순서대로 정리하였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한말에 [[공손도]]가 해동에서 힘을 일으켜 바깥 오랑캐들을 복속시키니 부여왕 위구태는 이제 요동에 속하였다. [[고구려|구려]]와 [[선비족|선비]]가 강성해지고, 부여가 (구려와 선비) 두 오랑캐 사이에 있는 것을 본 '''공손도는 종실의 여자를 (위구태왕에게 보내)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왕|간위거]]가 즉위했다. >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 >----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동이전 부여 ---- >백제(百濟)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며 부여(夫餘)의 별종인 듯 하다. '''구태(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다. >---- >《[[주서]]》 권49 이역열전 상편 백제 ----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 불렀다. 그로부터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이전 나라의 역사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 >《[[수서]]》 권81 동이열전 백제 ----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 >《[[북사]]》 권94 열전 백제 ----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중략)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길, '''백제는 성에 그 조상 구태묘를 세우고 4계절에 제사를 지낸다.''' >---- >《[[한원]]》 권30 번이부 백제 ----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