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웨이쥔 (문단 편집) == 생애 == 1888년 [[장쑤성|강소성]]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05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12년 귀국하여 [[탕사오이]]의 추천으로 [[위안스카이]] 대총통의 영문 비서 겸 국무원 총리 비서를 맡았으나 탕사오이가 국무총리에서 하야한 이후 그도 그만두었다. 1912년 컬럼비아 대학 공법학 및 외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15년 주 멕시코 중국 대사, 최연소 주 미국 중국 대사를 지냈다. 1916년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세인트존 대학, [[애버딘 대학교]], 버밍햄 대학, 맨체스터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미 중국 공사로 재직하다가 외교총장 [[루정샹]], 주영 중국공사 [[스자오지]], 주 벨기에 중국공사 위진조 등과 함께 1919년~1920년 [[파리 강화 회의]]에 중국 대표단으로 참여하여 중국의 이권 회수를 위해 노력했고 주영 중국공사로 이임한 이후 주미 중국공사 [[스자오지]], 대리원 원장 [[왕충후이]] 등과 함께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국권 수호에 앞장서 명성을 떨쳤다. 1922년 8월부터 2차 [[탕사오이]] 내각의 외교총장에 임명되어 3개월 동안 역임했다. 1923년 4월 장소증 내각에서도 외교총장에 임명되어 10월까지 역임했고 1924년 7월 장소증 내각이 사퇴하자 국무총리 서리를 겸했다. 1924년 5월 31일, 주중 소련 전권대표 [[레프 카라한]]과 <중소 현안해결대강 협정>, <중동로철도 임시관리 협정>을 체결하면서 중소 수교를 이끌어냈다. 1924년 [[북경정변]] 이후 [[장쭤린]], [[펑위샹]], [[돤치루이]]의 초청을 받고 북상한 [[쑨원]]이 그의 집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1926년 5월부터 10월까지 재정총장을 지냈으며 국무총리 대행 [[두시구이]]가 퇴진한 이후 1926년 10월부터 국무총리 서리 겸 외교총장을 지냈다. 30대 후반의 나이로 중화민국에서 손꼽히는 법률, 외교 전문가이자 중요 인재로 꼽혔다. 1926년 12월, 장쭤린이 안국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안국군 정부를 조직하자 [[양위팅]]의 주장으로 1927년 1월 12일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장쭤린의 군비를 조달하기 위한 '외교 부속 기관' 취급이라 실권은 없었고, 장쭤린은 구웨이쥔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자신의 파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느껴 권력을 주지 않았다. 1927년 6월 16일 장쭤린이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추대되자 눈치가 빨랐던 구웨이쥔은 당일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이제 본인은 본직과 각 직책에서 물러나길 원합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지병을 치료하고자 합니다.|| 이에 [[후웨이더]]가 국무총리 대행을 맡았고 6월 18일 장쭤린이 대원수에 취임한 이후에는 [[판푸]]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중국 국민당]]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동북역치]]를 통해 [[장쉐량]]의 항복까지 받아내 천하를 장악하자 처음에 그에 대한 체포령이 하달되어 파리로 도주했으나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한 [[장쉐량]]의 중재로 체포령이 취소되었다. 이후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외교전을 벌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자 [[국제연맹]]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리튼 조사단을 수행했고 11월 23일부터 12월 30일까지 외교부장 대리를 지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일본측과 교섭하여 송호정전협정을 이끌어냈다. 1932년 8월 5일 주불 중국 공사로 임명되었으며 1933년 [[열하사변]]에서 [[허잉친]]을 위시로 한 군부가 굴욕적인 [[당고정전협정]]을 맺자 크게 반발하며 결사항전론을 주장했다. 1932년 8월 16일부터 1933년까지 국제연맹 중국대사를 지냈으며 1936년부터 주불 중국 대사로 승격되었다. 1941년 5월 9일까지 9년 가까이 프랑스 대사를 지냈다. 1946년 주미 중국대사에 임명되었으며 미국에서 차관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956년 총통부 자정에 임명되었다. 1957년부터 1967년까지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관을 지냈다. 1967년 은퇴한 이후 뉴욕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5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