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연영 (문단 편집) === 최후 === 1907년, 일본군 헌병대는 이천에서 일어난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광주, 이천으로 진격하여 의병대를 격파하고 이천에 주둔했다. 이때 구연영의 밑에서 서사로 일하고 있던 이용주(李龍周)가 구연영을 밀고했다. 결국 구연영은 아들 [[구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07년 8월 24일 이천 장터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이때 구연영의 나이 43세, 아들 구정서의 나이 25세였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9일자 기사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구연영은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고, 아들 [[구정서]] 역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궁평리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11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감리회 선교사]][[분류:개신교 순교자]][[분류:능성 구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865년 출생]][[분류:190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조선의 유교 신자]][[분류:총살형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