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상(시인) (문단 편집) == 여담 == 프로야구 선수인 [[삼성 라이온즈]]의 [[구자욱]]이 친형의 증손자(종증손)이다 .실제로 구자욱의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실제로 [[구자욱]]은 어릴 때는 서울에 올라가서 자주 뵙기도 하고, 학교에서 학생들 읽으라고 걸어놓은 시가 종증조부의 시라서 놀라기도 했다는 일화가 드러나기도 했다. 서양화가 [[이중섭]]과 친한 친구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릴 때 그를 도와주기 위해 삽화를 그리는 직장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고은]]의 글로 이중섭이 삽화 그리기를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미술사학자 최열이 밝혀낸 바로는 실제로 삽화를 그린 적 있다. 1952년 10월 《문학예술》 김이석의 소설에 이중섭의 삽화가 남아 있다.] 이후로도 2번째 개인전을 열게 도와 주었고, 1956년에 [[이중섭]]이 타계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도 치렀다. 이중섭이 죽은 해에 구상이 발표한 대표작인 "초토의 시" 연작 중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시가 한 편 있다. 한편 이중섭의 작품들 중에 구상의 가족을 그린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www.sjpost.co.kr%2Fnews%2FarticleView.html%3Fidxno%3D65653&psig=AOvVaw0Kyfae14aM1X68-Q_AuNnq&ust=1686947654747000&source=images&cd=vfe&ved=2ahUKEwjWyf_uj8b_AhXDg1YBHS8tBI0Qr4kDegQIARBA|시인 구상의 가족]]" 이란 작품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6.25 전쟁]] 때 구상은 [[종군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의 소개로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구상 스스로가 '의기투합'이라고 표현할 만큼 둘이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격의없이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둘이 얼마나 친했는지 구상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박첨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때에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했는데, [[쿠데타]] 이전 한 달 가량 박정희는 신변 안전을 위해 구상의 집에 숨어지내기도 했다. 다만, 쿠데타 성공 이후 박정희가 정계 진출을 권하자, 구상은 '남산골 샌님으로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리고는 [[경향신문]]의 도쿄지국장 자리를 맡아 [[196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지냈다. 다만, 박정희 정권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은 아니어서,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품을 쓰기도 했고 이 때문에 [[필화]]를 겪기도 했다. 문인간첩단 사건[* 1974년 월간지 '한양'에 참여했던 [[이호철(소설가)|이호철]], 김우종, 정을병, 장병희, 임헌영 등 문인 다섯 명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한 사건이다. '한양'은 1970년대에 유신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재일동포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잡지로, 국내 문인들도 원고료를 받고 글을 싣고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모윤숙]], [[박종화]], 조연현 등도 이 잡지에 투고했고, 구상 또한 '한양'의 한국총판을 맡아국내 보급 업무를 담당했다. 대학가와 문단을 중심으로 유신 체제 반대 움직임이 커지자, 본보기로 문인 몇 명을 잡아넣기 위해 보안사령부가 혐의를 조작한 것.] 때에는 속임수까지 써 가면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문인들을 위해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증인]]으로 나간다고 하면 박정희 대통령도 탐탁잖아 하고, 정부 기관에서도 만류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구상은 증인 채택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증인에 나갈 의향이 없는 척 하다가 재판 당일에 법정에 나타나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사실 구상 자신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언론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누명을 쓰고 구속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1979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후 자신이 다니던 성당에 5년 내내 연미사(위령 미사)를 넣었다고 하니, 적어도 친구로서 정은 두터웠던 모양.[* 박정희와 구상의 인연에 대해서는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24|이 기사]]를 참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구상은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 위원, 민정당 총재 고문, 민정당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6.25 전쟁]] 이후 [[왜관읍]]에 정착하여 1974년에 서울 영등포로 [[이사]]가기 전까지 왜관에서 살았었다.]에 구상문학관이 있다. [[http://kusang.chilgok.go.kr/main| 홈페이지]] 문학관이 있는 만큼 문학관 주변 도로명주소는 구상길이다. 나름 집필실인 '관수재'도 복원되어 있긴 하지만 외관만 볼 수 있을 뿐, 항상 잠겨 있어서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 그런데 그가 [[왜관읍]]에 살긴 했지만 [[영남일보]] 편집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하와이 대학교]]에서 강의 활동을 하며 타지 생활을 더 오래 했다. (...) 그래서 그가 [[왜관읍]]에 살던 시기에, 칠곡군이나 [[왜관읍]]과 관련하여 쓴 작품은 전무하다. 한편, 구상 시인을 기리는 '구상문학상'이나 '구상한강[[백일장]]'은 서울 [[영등포구]][* 1974년 이후 30여년 간 살았던 곳이다.]에서 한다.(...) 문학관보다 먼저 거행되었다. >동이 트는 하늘에 >가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 >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를 날려. > >말굽소리. >말굽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를 띄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1946년 발표한 '여명도'라는 위의 시가 월남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당시 김일성이 이 시를 '퇴폐적, 세기말적, 반동적, 감상주의'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곧이어 어용작가들이 구상 시인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심지어 위 시가 실려있는 책 '응향'을 금서로 지정해버린다. 이미 김일성의 눈 밖에 난 뒤라 계속 북한에 잔류했다면 말로가 썩 좋진 못했을 것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1919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분류:능성 구씨]][[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금관문화훈장]][[분류:니혼대학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