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봉서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2011301347_2.jpg|width=100%]]}}} || [[1926년]], [[평안남도]] [[평양부(일제강점기)|평양부]](現 [[평양시]])에서 태어나 3살 때인 1929년에 부모님을 따라 [[서울특별시|경성]]으로 이사했고, [[대동세무고등학교|대동상업고등학교]](1945년 졸업)와 [[일본]]의 도요음악전문학교(東洋音樂專門學校)를 졸업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가수 [[김정구]]의 친형인 김용환이 이끌던 '''태평양가극단'''에 들어가 [[아코디언]] 악사로 활동하다가, 어느 날 연극 공연을 앞두고 배우 한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배역을 대신 맡아서 출연하게 되었고 대본에도 없는 애드립 위주의 연기로 관객들을 요절복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공연 후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쳤다"며 연출자한테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구봉서는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고 그 후 1956년 영화 '''애정파도'''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 국군 장병들에게 위문 공연을 해주는 군예대로 복무했을 때 [[북한군]]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군예대 대원들과 이동 도중 민가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다행히 국군 부대가 지원을 와서 구봉서를 비롯한 군예대를 구출해 주었다고 한다. 1958년 영화 '''오부자'''에서 영웅호걸 4형제[* 각각 이름이 첫째부터 영, 웅, 호, 걸 이었다.] 중 막내 걸 역할을 맡아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때부터 구봉서는 '''막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로 발돋움했다. 영화배우로서 구봉서는 주로 '벼락부자', '남자 가정부', '형님먼저 아우먼저' 등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해병]]', '[[수학여행]]' 등의 정극 작품에서도 눈부신 연기력을 선보인 바 있다. 특히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는 죽기 직전 남긴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에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겠지.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겨주니?'''" 라는 유언이 극중 최고의 명대사로 남았다. 또한 '수학여행'에서는 작은 섬마을 국민학교 분교에 부임하여 아이들에게 도시의 문명을 접하게 해주려고 좌충우돌 하며 서울 수학여행을 주선하는 인간적이고 자상한 선생님 역할로 호평받았다. 영화 수학여행은 1969년작인데, 서울에 있는 [[노면전차]]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극 중에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반공 영화]]인 <7인의 여포로> (1965)에서는 지적이고 신사적인 인민군 장교로 나왔는데, 이 때문에 북한 미화로 곤욕을 치룰 뻔 했다. 실제로 감독인 [[이만희(영화 감독)|이만희]]는 이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에 갇혔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영화는 그 장교가 남한 여군 포로들에게 감화해서 전향을 결심하고 함께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북한 미화란 주장이 나온 것.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구봉서-2.jpg|width=100%]]}}} || 코미디언으로서 최고의 재능을 보여주면서도 정극에서도 탄탄한 연기력,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로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1960년대 초중반 [[동아방송|DBS]] 라디오의 '''안녕하세요 구봉서입니다''', '''막둥이 가요만보''' 등의 [[DJ]]로 활약하면서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골라잡아 한 곡조 꽝!"''' 등등 여러 [[유행어]]들을 남기기도 했다. TV 시대가 개막된 1960년대 이후 구봉서는 TV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1967년 [[KBS]]의 코믹 드라마 '''사직골 구서방'''의 주연을 맡았고 1969년 개국한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와요]]의 고정 출연자로 맹활약 했으며, 그 외 MBC의 [[시트콤]] '''부부만세'''에서 [[배삼룡]]과 같이 코믹 연기를 선보인 한편 세태풍자 [[꽁트]] 프로그램 '''5분 무대'''의 [[MC]] 겸 출연자로도 호연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김희갑]], [[송해]] 등이 출연했고, 나중에 인기가 높아지면서 방송 시간이 2배로 늘어나 '''10분 무대'''로 개편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분무대.jpg|width=100%]]}}} || || 구봉서가 진행했던 5분 무대의 당시 신문 광고.[* 참고로 "하오"는 오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20시 55분.] || 이렇듯 구봉서는 당대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자리 잡으며 [[김희갑]], [[서영춘]], [[배삼룡]], [[곽규석]] 등과 함께 한 세대를 풍미한 희극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만으로 수식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위의 그의 활약상에도 나타나 있지만, 본업인 코미디 장르뿐만 아니라 진지한 정극 영화 출연도 매우 잦았었고 (400여편 정도에 출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정극에서도 주연급 역할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상당한 히트작들을 남기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정극과 코메디 영화를 병행했음에도 전혀 정극 배우로서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았다. 또한 각종 TV, 라디오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현장 MC와 스탠드업 코미디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와 비견될 만하게 다방면으로 활약한 이는 [[김희갑]] 정도이나, 정극에서는 조연에 머무르거나, 팔도강산 시리즈를 통해 일찌감치 노역으로 자리잡아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에서 구봉서보다는 스타로서 한 수 아래이긴 했다. 구봉서 이후 희극인이 코미디 영화가 아닌 정극에서 주연을 맡아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공연하며 히트작을 남긴 이는 없다. 당시 구봉서는 이후 TV쇼와 예능에 거의 모든 커리어가 집중되어 있는 후대의 한국 코미디언이나 공채 개그맨들과는 다르게 일종의 최고의 코미디언 겸 최고의 정극배우라고 보는 것이 맞으며, 명실상부 한국 연예계 초창기의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서구권의 [[짐 캐리]], [[로빈 윌리엄스]], [[에디 머피]], [[빌 머레이]]와 같이 정극과 코미디를 수시로 넘나들며 어느 한 쪽으로 크게 치우쳐지지 않고 두 장르에서 최정상의 위상을 유지한 서구권의 코미디언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이런 행보를 보이는 한국의 개그맨이나 예능인들은 매우 드물다. 동시대의 배삼룡과 서영춘은 정극에서의 활약이 드물었으며 [[이주일]], [[심형래]], [[이경규]], [[김국진]], 하다 못해 지금의 [[유재석]]도 TV쇼 진행자 포지션에 가깝지 이런 입체적인 커리어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심형래와 이경규는 구봉서처럼 배우나 더 나아가서 감독으로서 정극 영화에 꿈이 있었으나, 실패한 케이스들이다. 이주일은 코미디 영화에만 출연했었으며, 김국진은 [[반달곰 내 사랑]]이란 정극 드라마에서 좋은 결과를 얻긴 하였으나, 이내 내/외적으로 슬럼프를 맞으며 배우 활동은 끊겼고, 예능 커리어도 한동안 부침을 겪었다. [[임하룡]]은 코미디 연기는 거의 접은 채 아예 [[배우]]로 전업했다. 구봉서는 당시로는 드문 [[고졸]]이라는 고학력에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한 덕분에 [[일본어]]가 능숙하여 늘 손에 일본 문예잡지나 문학소설을 들고 다니며 읽는 등 남다르게 이지적인 면도 있었다. 한마디로 1980년대 이전까지 그는 당대 연예계의 지배자라고 할 만한 위치에 서 있었다고 봄이 옳다. [youtube(pxjjGmIGIfg)] 이 영상은 72년에 방영되어 당대에 명성을 날렸던 코미디였던 '양반인사법'이다. 최후반부가 삭제되긴 했지만,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 '''구봉서''', [[송해]], 박시명[* 朴時明. 1924년 생으로, 이 4명 가운데 가장 연상이었고 [[꺼벙이]]라는 별칭으로 인기를 누렸다. 평소 [[오토바이]] 광으로, 그 당시 고가이던 대형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다 뒤에 태운 후배 코미디언을 사망하게 하는 등 여러 번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이 4명 중 가장 먼저 1986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4인의 개그를 볼 수 있는 희귀한 영상이다. 송해, 구봉서, 배삼룡, 박시명, 순으로 앉아 있다. 당시는 생방에 방청객들이 보는 가운데 개그를 진행했는데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애드리브를 날리며 연기하는 모습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21세기에 보아도 꽤 재미있다. [youtube(AtBMtbWnQTY)] 1975년, [[농심라면]] 광고에 [[곽규석]]과 출연하여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이후 구봉서는 농심을 넘어 국내 라면계를 대표하는 [[신라면]]의 첫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다. 1980년대에는 [[이주일]], [[심형래]] 등 여러 후배들의 등장으로 이전과 같은 지배자의 면모는 약해졌으나, 코메디언계의 대부로 1990년대까지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97년, 자서전 '[[http://garykam.tistory.com/100|코미디 위의 인생]]'을 출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