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본근(농구) (문단 편집) === 고교 및 대학 시절 === 대전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이후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한 구본근은 2, 3학년 때 1년 후배인 [[조상현]], [[황성인]] 등과 함께 돌풍을 이끌며 1993년에 개최된 협회장기 우승과 MVP에 올려 놓은 덕분에 차세대 센터로 낙점받게 되어 연세대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 첫해인 1994년에는 대표팀에 차출된 [[서장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94 대학농구연맹전 2차대회에 선발 센터로 출전하였으나, 선배 [[이상민(농구)|이상민]]의 국대차출과 [[우지원]]의 부상 등 다른 주전들의 공백이 너무 컸던 탓에 조별예선리그에서 [[건국대학교]]와 [[한양대학교]]에 각각 대패하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주전들이 복귀하면서 [[1994-95 농구대잔치]]부터는 [[서장훈]]의 백업 또는 4번 포지션의 로테이션 멤버로 주로 출장하였는데,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3점슛을 쏠 정도로 슛거리가 길었고 노마크 찬스에선 덩크슛을 가볍게 꽂을 정도로 탄력이 좋아 여느 실업팀의 노장센터들보다 훨씬 나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연세대가 2년 연속으로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전승을 달성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팀은 예선리그 8위팀 [[서울 삼성 썬더스|삼성전자]]와 맞붙은 8강전에서 삼성전자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와 심판의 묵인까지 더해지며 1승 2패로 역전패, 8강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된다. 특히 선배들의 폭력이 가장 심했던 8강 3차전에서, 전반중반 [[서장훈]]이 상관타를 맞아 실려나간 뒤 신입생 센터로서 상대팀 센터들([[이창수]], [[박상관]], [[강을준]] 등)을 맞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팀은 결국 패했고, 골밑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무리한 모습을 보이더니 경기가 끝난 직후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산소 마스크를 쓴 채 응급실로 실려가고 말았다. 자신의 고향인 [[대전광역시|대전]]에서 몸을 추스르며 2학년 상반기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자 6월에 열린 [[1995 대학농구연맹전]] 1차대회부터 복귀, 미국 유학을 떠난 서장훈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고, 연세대가 당시 최강팀 고려대에 이어 2인자 자리를 지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도 [[우지원]]-[[김훈(농구)|김훈]]-[[조상현]] 등 3점슈터 군단이던 연세대를 정규리그 3위까지 오르는데 기여했다. 덕분에 3학년 때는 95-96 농구대잔치 올스타전 대학선발팀으로 출전하기도 했고, 22세 이하 농구 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 [[1996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한 서장훈이 돌아오면서 다시 로테이션 빅맨으로 돌아가 연세대가 96-97, 97-98 농구대잔치를 연이어 제패하는데 기여하지만, 이 시절 완벽한 파이터 수비수로 거듭난 [[김택훈]]과의 주전경쟁에서 살짝 밀리며 출장시간이 줄어든다. 그래도 대학레벨에선 상위급 센터로 인정받아 졸업해이자 4학년이던 1997년 멜버른에서 열린 FIBA U-22 선수권대회 대표팀 센터로 선발. 동기인 황성인, 조상현, [[김택훈]] 등과 같이 출전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