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룡채성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owloon_Walled_City_Early_Stage_Model_in_History_Museum.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wloon-Walled-City-1898.jpg|width=100%]]}}} || ||<#ddd,#191919> '''19세기 말 구룡채성의 모습''' ||<#ddd,#191919> '''1898년 구룡채성의 모습''' || 본래 구룡채성은 [[청나라]]의 요새로 청의 주전력인 [[팔기군]]이 군대로 주둔하면서[* 원래 팔기는 [[만주족]]의 팔기만주 및 [[몽골인]]의 팔기몽고 등 [[기병]]이 주축이었으나 이 때 팔기는 화기수 및 수군인 팔기한인의 대거 방출과 팔기만주의 전력 쇠퇴로 대부분 없어지고 몽골팔기인 팔기몽고만 남아 유명무실해지고 대부분이 [[한족]]으로 구성된 녹영과 신식 군대인 상승군으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아편전쟁 당시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등이 이끌던 몽골팔기가 분전했으나 [[전열보병]]에 다 쓸려나갔으며 팔기몽고의 지도자인 내몽골 왕공부터가 오랜 [[평화]]에 젖어 유목민 기상을 잃고 [[전투]] 감각도 잃은 상태였다.] [[홍콩섬]]의 [[영국군]]을 감시하던 요새였다.[* 원래 설치 목적을 생각해보면 현재의 [[중국 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와 미묘하게나마 연결되기는 한다.]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 이후 구룡채성이 있던 [[구룡반도]]까지 [[영국]]의 소유가 되었지만 구룡채성만큼은 중국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거의 몽골팔기로 구성된 팔기군은 [[도주]]했으며 텅 빈 성채는 여전히 청의 영토라서 [[객가]] 사람들인 한족들이 빈 성채에 대거 들어가 점령했다. 이들은 객가인 특유의 전투력으로 [[영국군]]의 진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원래 평범한 성벽 마을이었으나 [[슬럼가]]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인데 우선 요새였던 이 장소가 [[거주지]]가 된 것은 홍콩의 [[일제강점기(동음이의어)|일제강점기]]인 [[홍콩일치시기]]부터였다. [[1941년]]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구룡채성의 성벽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헐어낸 성벽으로는 카이탁 비행장의 확장을 시도해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을 용이하게 했다. 짧은 점령 시기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이 패퇴하여 [[일본군]]도 쫓겨나고 다시 영국 땅이 된 뒤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중국 대륙]] 남부 출신 부랑민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구역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전후에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난민 문제와 관련된 일이라 상관없는데 문제는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화민국은 이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1948년]]에 [[영국인]] 관리와 [[홍콩 경찰]]의 진입 시도를 막아냈다. 그리하여 [[영국령 홍콩]] [[식민지]] [[정부]]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문제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도 관리를 거부하여 완전한 [[무법지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민국과 영국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치안 공백이 곧 해결될 것 같았지만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면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국부천대|도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면서 구룡채성의 치안 문제는 더럽게 꼬여버린다. 상술한 대로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구룡채성을 관리해야 할 '''중국'''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쪼개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 [[영국]] 정부는 [[1950년]] [[1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다는 선언을 했지만 이번엔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수교]]를 거부했다. 중화민국은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실효성이 없었고 영국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개입을 거부하여 개입할 수 없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홍콩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이 지대를 굳이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관리를 포기한 상황에서 결국 구룡채성의 행정 관리 문제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중일전쟁]] 및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부랑민이 몰리기 시작해 [[195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난민이 몰려오는 가운데 홍콩 정부에서 정착을 거부한 난민들이 구룡채성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대약진 운동]]같은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피난민들이 폭증했었다. 대약진 운동 당시 접경지에서는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홍콩에 밀입국하려는 중국 본토인들이 허다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대륙이 휩싸이자 지식인, 의사, 변호사 등 온갖 엘리트들이 홍콩으로 넘어와 영국, 미국 등에 망명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이들도 거지꼴이 다 돼서 구룡채성에 몸을 의탁하다 서양 선교사들이나 중국계 목사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관할 문제로 [[홍콩 경찰]]이 치안유지활동을 못하니 온갖 범죄 행위들이 벌어졌다. '''살인/강도 등 강력사건이 벌어져도 어떤 [[경찰관]]도 손대지 않는, 아니, 손댈 수 없는 진정한 무법지대였다'''. 예를 들어 [[마약]]거래를 적발해도 홍콩 거주권자만 처벌할 수 있었다. 홍콩 거주권이 없는 성채 난민들은 사실상 무국적이라 어찌 할 도리도 없었다. [[홍콩 경찰]]은 바로 코앞에 몽콕 [[경찰서]] 등의 경찰서 여럿을 두고 있었지만 있으나 마나였는데 성채는 소유권도 그렇고 [[삼합회]]가 판치는 곳이라 [[1960년대]] 당시 부패한 경찰들이 진입을 꺼렸다.[* 성채의 소유권이 강조되는 게 사실 [[염정공서]] 발족 전 경찰 조직이 부패했고, 부패한 경찰간부들이 삼합회와 유착해 일종의 핑계를 삼은 게 크다. [[1980년]] 이후 성채 얘기가 싹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부패가 일소되면서부터 일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잘해야 경찰서장밖에 못 해서 서장직에 오르면 100% 한 몫 단단히 챙겨 퇴직할 생각만 했다.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가 나온게 [[1950년대]] 및 [[1960년대]] 풍 이야기이다.] 이렇게 홍콩, 영국, 중국이 모두 관여하지 않는 상황을 '''3불관'''이라고 했는데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 정부가 뒤늦게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한 이후에 이미 [[베이징]]과 중영국교정상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중화민국 정부는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성채의 영유권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못한 채 붕 떠버렸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홍콩 소방처]]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고, 환자가 생겨도 역시 홍콩 소방처의 [[구급차]]를 못 부르고[* 만약 [[대연각호텔 화재]], [[조엘마 빌딩 화재]]급으로 화재 규모가 컸거나 [[카이탁 국제공항]]쪽으로 이착륙하는 항공기가 구룡채성 쪽으로 추락했다면 [[9.11 테러]]에 버금가는 인명피해를 냈을 수도 있다.] 성채 내 [[병원]]에서만 취급이 가능했다. 의무교육도 제공되지 않아 [[구세군]]이 세운 [[유치원]]밖에 없었다.[* 당시 서양인 선교사이나 중국인 목회자들에 따르면 유치원에서는 영어와 광동어 교육 및 기본적인 위생상식 등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표준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 여기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이후 세대는 성채 밖으로 나와 영어가 능숙하고 중국본토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홍콩인으로 살게 된다.] 전기와 수도는 밖에서 무단으로 끌어다 쓰거나 자체적으로 우물을 판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충당했다. 배수관은 길거리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길을 가다가 노후한 배수관이 터져 갑작스러운 [[물폭탄]]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법의 허점을 틈타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매춘|성매매]]업소, [[도박]], [[아편]]굴, [[헤로인]], 무허가 [[병원]], 무허가 [[치과]] 등 각종 불법 업소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 업소는 고객 유치 경쟁으로 홍콩 도심으로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약 치료소도 있었다. 이 마약 치료소는 영국인 선교사 재키 풀린저(Jakie Pullinger)가 운영했다. 이들 중국 의료인들은 말이 무허가 의료인이지 중국에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정식으로 의료 활동을 해왔던 이들로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피해 도망쳤다가 홍콩에서 중화민국 의사 면허가 인정되지 않아[* 당시 홍콩은 영국령이었으므로 영국 의사 면허로만 의료 행위가 가능했다.] 정식 개업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불법 영업을 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었다.[* 사실 법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들은 무허가 의료인이 아니다. 애초에 구룡채성은 '''법적으로는 영국령 홍콩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였기 때문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가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의료행위에 대한 법적 규제나 행정기관의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의료 지식 없이 의술을 행하는 일명 [[돌팔이]]는 아니었다는 소리. 공부해서 실력을 쌓고 정당하게 취득한 의사 면허인데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휴짓조각이 된 역사의 희생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성매매]]업소나 [[도박장]]같은 [[범죄]]와 연관이 높은 업소나 불법 의료시설같은 업소만 있는 건 아니고 저렴한 [[인건비]]와 [[세금]]이 없다는 장점 아닌 장점 덕택에 사설 식품공장[* [[국수]], [[생선]], [[딤섬]], [[에그타르트]] 등의 식품 가공. 당시 홍콩 유명 [[레스토랑]]에 대부분 납품하였다.]이나 [[의류]] [[공장]], [[플라스틱]] 공장 같은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구룡채성에 많이 들어서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무허가였다.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쥐,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환경]]뿐만 아니라 쉬는 요일없이 매일 12시간씩 일해야 했다. 난민에게 [[노동법]] 따위가 적용될 리 없었다. 그래도 식품공장의 경우는 [[위생]]을 조금이나마 신경 쓴 편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cmp.com/f79faa1a2372b61a7e9a8b1aebbde955.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hkheadline.com/201308311321151440_600w.jpg|width=100%]]}}} || ||<#ddd,#191919> '''1971년 구룡채성의 모습''' ||<#ddd,#191919> '''1986년, 주변의 목조 주택들이 철거된 이후의 모습''' || 이후 [[1970년대]] 들어 무허가 고층 건물이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 같은 시기 구룡채성과 비슷했던 홍콩의 다른 슬럼가들은 공영 아파트들로 재개발되었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보트피플]]로 전락한 [[베트남인]]까지 대거 몰려들어 성채는 더욱 혼잡해 졌는데, 특히 이들이 베트남 [[화교]]들이어서 베트남계 [[삼합회]]가 토착 삼합회 및 본토 삼합회와 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심할 땐 매일 밤마다 삼합회끼리 전투로 총소리가 들리기까지 했으며[* 삼합회는 각종 [[중화기]]를 [[중동]]이나 [[러시아]] 등에서 [[밀수]]해서 총격전에 심심치 않게 중화기를 동원하였다.] 거의 [[이라크 내전]] 당시 [[바그다드]]와 비슷한 꼴이었다. 그러나 [[1984년]] [[중영공동선언]]이 체결되어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이 결정됨에 따라, 영원히 치외법권일 것 같던 구룡채성도 철거 수순에 돌입한다. 우선 경찰이 기습적으로 성채를 포위,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1986년]]에는 영국령 홍콩 정부가 원래 주인인 중국 정부의 암묵적 동의 하에 경찰을 동원하여 범죄자를 싹쓸이했다. 이 때 [[기동대]]인 PTU와 [[대테러부대]]인 SDU, 그리고 [[장갑차]]까지 동원되어 중화기로 무장하고 버티던 삼합회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홍콩 경찰]]의 웡타이신구 경찰국이 정식으로 이 곳을 경찰 순찰구역으로 지정했다. [[홍콩 소방처]]의 구룡성 [[소방서]]도 개서해서 [[구급차]]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세군]]등 봉사단체의 [[마약중독자]] [[갱생]] 및 [[회복]] 운동이 벌어져 마약에 중독됐던 사람들이 치유받게 되었으며 이곳 주민이 직접 만들어 활동한 [[자경단]] 때문에 [[치안]]도 향상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molition of walled city 2.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molition of walled city.webp|width=100%]]}}} || ||<-2><#ddd,#191919> '''1993년 촬영된 철거되는 구룡채성의 모습''' ||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 추가 논의 끝에 구룡채성의 철거를 [[1987년]]에 발표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27억 홍콩 달러를 들여 구룡채성에 살던 33,000여명의 주민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인당 약 82,000 홍콩 달러로,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현재 3000만원정도.] 보상금이 적다며 불만을 품은 주민도 있었으나 홍콩 정부는 1991년 11월부터 1992년 7월에 걸쳐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당시 공식적으로 영국령 홍콩이 아닌 중국의 영토였지만 어차피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라 영국령 홍콩 정부가 구룡채성의 철거와 공원 조성 작업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홍콩 경찰]]에 의해 철거 법집행에 들어간다. 철거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직전에 성채의 합법적 소유권자인 중국 정부는 '''탐험가'''들로 하여금 [[지도]]를 작성하게 하였다. 철거 작업은 [[1993년]] 3월 23일에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악명 높던 구룡채성의 주택가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거 과정에서 그 유명한 [[데이비드 조던]]이 참여하기도 했으며 반대 피켓이 영어/중국어로 내걸려 영국과 중국 정부를 질타하는 시위도 있었으나[* 대책없이 난민을 거리에 내몬다는 이유였는데 당연히 난민에겐 [[정부]] 아파트를 근처의 록푸 등에 분양해주고 보상을 쥐어줘서 내보냈다.] 결국 철거를 강행했다. 영국 정부가 이렇게 철거를 서두른 이유는 성채가 남은 채로 반환되면 중국 정부가 '제국주의하의 홍콩의 실상'으로 프로파간다에 쓸 거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owloon_Walled_City_Park_View_3_201007.jpg|width=100%]]}}} || ||<#ddd,#191919> '''철거 후인 2009년 9월의 모습(구룡채성공원)''' || 홍콩 정부는 이어서 이곳을 구룡채성공원(九龍寨城公園, 까우룽짜이씽공원, Kowloon Walled City Park)으로 조성했다. 공원 조성 작업은 [[1995년]] [[8월]]에 완료되어 공식적으로 홍콩 정부의 시정총서(市政總署, Urban Services Department)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22일]]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던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에 의해 공식 개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 이 공원 일대는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는 성채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